<남은 여생의 시련>을 통해 고찰한 사할린 한인의 귀환과 귀환자의 권리에 관한 일고찰

Abstract

In Muhak's Diffuculty at Remaining Life is a work of drama that deals with the issue of permanent repatriation of Koreans in Sakhalin and when it was put on stage in Busan in 2016, it served as an opportunity to raise awareness of the magnitude of the problem in Korea. The significance of this work lies in the fact that it deals with the chain of historical events that were caused by the return of those who were deported to Sakhalin or were taken there for similar reasons. As the protagonist Won Sangmo was unable to fulfill the conditions for permanent repatriation, he had to employ many expedients in the process of solving the problem and returning to Korea. He had to correct his birth certificate that wrongfully certified that he was born after August 15, 1945 and got engaged in a disguise marriage in order to hide the fact that he was single. The circumstances of Kim Yonghee, the woman who agreed to get married to Won Sangmo in disguise, is not much different. In order for them to break away from their circumstances of having to wander Sakhalin as wreckages of history and their home country, they had no choice but to accept the conditions of permanent repatriation even if those measures might be unjust. The playwright, In Muhak, conveys the message of the dilemma that the Koreans in Sakhalin are faced with through these choices and contradictions. He makes a sharp remark regarding their current circumstances based on their history of being estranged and of being denied any chance of being saved. This is also a time of hardship that Koreans in Sakhalin had to endure as Korean nationals living abroad.

Keywords

In Muhak, Ostrov Sakhalin, Soviet Koreans in Sakhalin, diaspora, forced migrant, Nameun Yeosaengui Siryeon(Difficulty at Remaining Life)

Ⅰ. 문제 제기

1900년대 초 조선의 국력이 쇠하고 제국주의 열강이 한반도를 노골적 으로 침략하면서, 조선의 전통적인 영토 바깥으로 이주하는 재외한인의 숫자가 증가했다. 봉금령(封禁令)을 위반하고 만주로 이주하는 조선인들 을 필두로 하여, 중국 본토와 일본 그리고 러시아(연해주)와 미국 심지어 는 멕시코나 하와이 등지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던 한인들의 수효가 점 증했다.

이들 중에는 자발적인 이주를 선택한 이들도 존재했지만, 강제 이주를 종용 당한 이들도 적지 않았으며, 표면적으로는 자발적 이주의 행태를 띠 지만 실질적으로는 외부 요인에 결부된 반강제적 이주도 상당했다. 더욱 문제가 되는 사안은 강제 징용, 관부 알선, 불법 모집 등 애초부터 자율적 인 의사에 반하는 사기성 짙은 이주 ―정책 당국의 묵인이나 협조 하에 ― 가 버젓이 자행되었던 점이다. 본 연구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인 일본의 사할린 이주 정책을 보면, 시 기 별로 변전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강제성과 불법성이 짙어지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이은숙 외 20–22). 설령 최초에는 자발적인 의사에 의한 이 [End Page 131] 주가 주류를 형성했다고 해도, 그 결과 국내 귀환이나 거주의 자유가 불가 능해지면서 역시 강제성이 부여된 상황으로 전락한 사례 역시 드물지 않 게 발생했다. 이주를 둘러싼 관련 정황과 충족 요건들은, 한민족의 이주가 기본적으로 강제 이주의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그 결과 재외한인의 귀환 문제는 한민족의 숙원 사업이 되었고, 그들의 생사 확인부터 처우 개선, 보상 문제, 국민권리 회복 등의 과제는 이후 중 대한 과제로 남게 되었다(이러한 숙원 사업과 이후 과제의 상당 책임은 전 범 국가인 일본을 비롯하여 주변 국가들에게도 부여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생성된 재외한인은 연변에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조선족' 을 비롯하여, 일본 소재 '재일동포,'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재미 거주 '한인' 등으로 다양한 분포를 이루게 된다. 이 중 본 연구는 지금까지 재외한인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덜 조명 받은 '사할린 한인'에 초점을 맞추고, 사할린 한인 이주와 귀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희곡(연극) 작품을 핵심 분석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1 이를 위해 현재 까지 진행된 사할린 한인 관련 연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사할린 한인 희 곡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기에, 사할린 한인에 관심을 피력한 연구로 관련 범위를 확장해 보겠다. 일차적으로 산출된 연구를 분류하면, 일단 역사적 관점을 부각시킨 연 구2와 사회학적 시각을 앞세운 연구3 그리고 법률/정책 관련 연구4 등으로 대분할 수 있다. 또한 조사 방식에 따라 문헌 조사와 통계 조사뿐만 아니 [End Page 132] 라, 현지 조사5와 인터뷰(개인 면담 조사) 조사6 그리고 구술 조사의 특수 형태로서의 생애 조사7 등으로 다시 세분할 수 있겠다. 또한 적지 않은 연 구가 이러한 조사 방식을 연계 혹은 결합하여 활용되고 있다.

이로 인해 전반적인 연구 산출량이 그다지 풍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할린 한인의 인권과 갈등에 대한 다양한 학문적 접근이 그나마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해야 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선행 연구(시각)을 존중하고 이 를 선행 연구 결과로 수용하면서도, '그들-사할린 한인'의 실태와 내면적 정황을 살필 수 있는 새로운 연구 방법을 도입하고자 한다. 유효한 연구 방법을 활용할 때에야 비로소 사할린 한인의 문학 작품에서 그들의 삶과 역사적 상흔 그리고 내면 풍경(애환)을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러한 연구라야 기존 연구가 간과한 그들의 내적 욕구의 숨겨진 지형을 보 여주는 데에 특장을 발휘할 것이며, 자료 중심형 연구에서는 심도 있게 파 고들 수 없었던 인간적 번민 양상과 이에 대한 대처 방식을 고찰할 수 있 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선행 연구를 정리하면, 지금까지 사할린 한인에 대한 연구가 한 인물이 나 한 집단군을 한정된 자원으로 하여 상정하고 연구자의 가정을 확인하 는 ― 넓은 의미에서 문제제기를 해결하는 ― 방식에 고착되어 있었음을 확 인할 수 있다. 사회과학적 연구 방법에서 이러한 자료와 이에 대한 검증은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는 자료 범위(가령 제한 된 설문자나 조사 표본)를 벗어나는 경우에는 그 유효성을 장담하기 힘들 며 상황에 따라서는 한정된 자료로 인해 제한적인 시각을 벗어나기 힘들 다는 한계도 애초부터 감수해야 했다. [End Page 133]

따라서 이러한 한계와 약점을 해결할 수 있는 보완 방법이 절실하게 필 요한데, 본 연구는 사할린 거주 작가 인무학이 집필한 희곡 <남은 여생의 시련>에 담겨 있는 사회상과 의식 구조를 분석하고, 그 작품에 반영된 사 할린 한인들의 이주 역사와, 심리적 갈등 상황, 문화적 변용 양태, 그리고 귀환 과정과 그 이후의 문화 갈등 전반을 살펴봄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해 소하고자 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을 뭉뚱그린다면, 문학사회학적 방법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문학사회학 중에서 '텍스트의 사회학'으로 대변되는 연구 방법론 은 루시앙 골드만(Lucien Goldman)이나 피에르 지마(Pierre Zima) 등에 의해 제창되거나 다듬어져 왔다. 이러한 방법론은 작품 내에 수용된 사회 적 요소를 대상으로 삼고, 해당 문학 텍스트가 겨냥(묘사)하고 있는 사회 상에 주목하여, 문학과 사회의 관련성에 대해 천착하는 연구 방법론이라 고 할 수 있다.8

문학사회학은 분석 대상(텍스트나 묘사된 사회상)을 구체적인 사실(설 문이나 면담)로 확정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분석 대상(텍스트)에 함유 된 사회문화 현상 전반을, 집단의 기억을 담은 '작품'이라는 보편적 실체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는 이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연구 방법론이다. 더구나 사할린 한인처럼 자신들의 문제를 제대로 노출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자신 의 내면과 역사의 이면에 감추고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 그들-사할린 한 인의 절절한 사연을 담은 문학(작품)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표현 방식이 될 수 있으며, 자신들도 평소에는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던 무의식의 지형 과 내적 비밀을 드러낼 수 있는 '내면의 언로(言路)'가 될 수 있다. 더구나 인무학의 <남은 여생의 시련>은 문학적으로도 일정한 성취를 보이고 있고 2016년 부산 극단 이그라에 의해 부산연극제 참여작으로 공연되면서 미학 [End Page 134] 적으로 다듬어져 한국의 현실에 맞게 조율된 바 있다.9 이러한 특징은 분 명 이 작품의 연구 가치를 증강시켰을 것이다.

Ⅱ. 사할린 한인의 명칭 문제

사할린에 억류되었던 조선인 혹은 한인 동포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가리키는 호칭에 대해 우선 정리할 필요가 있다. 사할린 에 (반)강제적으로 이주한 한인을 부르는 명칭은 그동안 다양하게 사용되 어 왔다. 일례로 '러시아 고려인,' '사할린 동포,' '조선사람,' '재러시아 조선 인' 그리고 '사할린 한인' 등이 그것이다(우복남 403–04).

'고려인'이라는 명칭은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폭넓게 범칭하는 용어이기도 하지만, 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조선인을 가리키는 용어로 활용되고 있어 의미상의 왜곡이나 혼선이 빚어질 우려가 있다. '사 할린 동포'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상호 관계에 초점을 둔 명칭이다 보니, 해 당 지역의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약점을 지닌다. 한편 '재외동포'는 사할린이나 러시아에 거주하는 이들에게만 국한하여 사 용하기 곤란한 용어이고, '재러시아 조선인'도 기존 고려인이라는 호칭과 변별되는 특성을 보이지만 부자연스러운 인상을 면하기 곤란한 호칭이다. 마지막으로 '조선사람'은 지나치게 포괄적이어서 모호한 인상을 함부로 배 제하지 못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사할린에 이주하 여 어떠한 형식으로든 거주한 한민족과 그 가족으로서의 일원을 '사할린 한인'으로 호칭하고 그 귀환을 둘러싼 문제와 문화적 기원을 추적하는 개 념적 기반으로 삼고자 한다. 사할린 한인이라는 개념 역시 세밀하게 고찰 [End Page 135] 하면 여전히 개념 규정상의 결함을 안고 있는 용어이다. 가령 사할린 한인 의 범주를 2차 대전 이전에 거주했던 사람들('원주 한인')뿐만 아니라, '북 한 파견 노동자'와 '소련 각지(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한 한인' 등까지 포괄하여 지칭하면 그 범위가 상당히 확장되는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 기 때문이다(조정남 188).

다만 이러한 문제들은 여타 용어를 선택할 때에도 산견되는 문제이므 로, 여기서는 사할린 한인이라는 용어를 범용하여 사용하도록 하고, 만일 사할린 한인 중에서 억류된 자의 처지에 초점을 맞출 때에는 '사할린 억류 한인(혹은 조선인)'으로 세분하여 지칭하고자 한다. 이처럼 세부적인 정합 성에서 한계를 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할린 한인'이 가장 보편적 으로 사용되는 용어라는 이점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사할린 한인의 범주 설정이 본 연구의 중요한 문제 제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Ⅲ. 사할린 한인의 당면 문제와 입장들

1.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 중심의 영주귀국 요건에 관한 논란

한국 정부는 2000년 사할린 거주 한인들의 영주귀국 사업을 본격적으 로 추진하면서, 영주귀국 요건으로 '강제 징용 여부'와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을 제시했다. 영주귀국 사업은 비단 한국만의 독단적인 결정 사 안이 아니므로, 이러한 요건은 관계 당사자들과 관련 국가들의 합의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욱 온당할 것이다. 합의된 요건에 따르면, 강제로 징용된 자와 그 부모 밑에서 1945년 8월 15일(독립) 이전에 태어난 자식(세대)은 귀국 대상자에 포함될 수 있다(조재순 103–04). 그리고 한국 정부는 이러한 세대(들)를 잠정적으로 '사할린 1세대'로 간주했다.

영주귀국 사업에 대한 논의는 1994년 한일정상회담으로 거슬러 올라간 다. 실무회담에서 사할린 한인 1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영주귀국 시범사 [End Page 136] 업'을 구상하고 그 실현 방법으로 귀국 후 체류 시설(집단 이주촌)을 건립 하는 방안은 논의하였다. 특히 한일 양국은 체류시설 신축에 공동으로 자 금을 지원하기로 합의했고, 이러한 체류시설에 입주할 수 있는 자격자를 선별하기 위해서 영주귀국의 요건을 갖춘 자를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 생자로서 1945년 8월 15일 이전 사할린에 이주하여 계속 거주 중인 자"로 규정했다(외교통상부 일본과 2008).

하지만 이러한 영주귀국 요건은 본질과 실상에 부합하지 않은 측면이 많기 때문에, '영주귀국'을 정의하는 방식에서부터 차분하게 그 문제점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정밀한 검토를 위해 대한적십자사가 규정한 '영주귀 국'의 정의를 살펴보자. 여기에서 영주귀국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기간인 1930년대 후반부터 강제 징용 등으로 사할린에 이주하여 2차 세계대전 종 료 후에도 모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사할린에 잔류하게 된 사할린 한인 들이 모국(한국)으로 귀환하는 행위나 그 귀환을 돕는 행위 일체를 가리킨 다(대한적십자사 2013).

그러나 이러한 규정에는 영주귀국자의 범위와 성립 요건에 대한 일정한 제한이 이미 가해져 있는 상태이다. <남은 여생의 시련>에서 남자 주인공 (영주귀국에 성공한) '원상모'도 이 요건을 법적으로 충족하지 못하는 인물 로 설정되었다. 원상모의 부모는 각각 경상북도 봉화(아버지)와 경상남도 기장(어머니)에서 태어나 거주했던 인물로, 그 중 아버지는 탄광 강제노역 을 위해 사할린으로 강제 이주된 조선인이었다. 사할린에서 만나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 원상모가 태어났는데, 본래 생년월일이 1945년 4 월 1일이었음에도 법적 신고가 늦어지는 바람에 1945년 8월 16일로 생일 이 기록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해방 이전'에 태어나야 한다는 요건을 문 제적 인물 원상모는 법률적으로 충족하지 못했고,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 기 위해 러시아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생년월일을 하루 앞당겨 8월 15일 로 바꾸는 불법을 자행해야 했다. 그런 연후에야 원상모는 영주귀국자 명 단에 간신히 포함될 수 있었는데, 물론 그 과정에서 결혼한 자이어야 한다 [End Page 137] 는 또 다른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서 '김용희'라는 여인과 위장(계약) 결혼 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김용희

미안하지만, 만약에 생신이 8월 16일이라고 가정하면… 하루차이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까?

안학구

법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사할린 동포 1세라면1945년 8월 15일 전까지 태어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단 그분들만한국에서 혜택을 받을 수가 있는 거지요. (인무학 15, 필자 강조)

작품 속 설정은, 영주귀국 요건의 부당함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강 제 이주된 한인들과 자식 세대인 조선인(한인)들에게 영주귀국은 필생의 숙원인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해방 이전에 태어나야 한다는 요건은 분 명 그들의 숙원을 가로막는 중대한 방해 요인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 면 영주귀국의 요건으로 8월 15일 이전 출생자여야 한다는 원칙(결혼 여 부를 충당해야 한다는 조언도 마찬가지)은 해당 지역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폭력적인 요건이라고 극작가는 작품을 통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극작 의도(문제 제기)가 개인적인 차원에 입각한 발언 인가에 대해 논구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기존 연구 성과를 참조해보 자. 1990년대 초 사할린 한인에 대한 주목할 만한 역사적 정의가 시행된 바 있는데, 이를 참조하면 1945년 8월 15일이라는 요건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다. 노영돈은 사할린 한인을 규정하면서 "협의로는 일제 침략기에 일본의 국가총동원 체제하에서 사할린 남부로 강제동원당 하고 종전 후에도 일본의 악의적인 귀한 의무 회피에 의하여 사할린에 정 착할 수밖에 없었던 한인을 말하고, 광의로는 이들과 그 자손들을 포함하 는 개념"이라고 주장했다(124).

이러한 개념과 규정은 정당하게 인정될 수 있다. 세밀하게 주목해야 할 [End Page 138] 대목은 '광의'의 요건이다. 사할린으로 압송된 인물들뿐만 아니라, 귀환 과 정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긴 이들과 모국으로의 귀환 기회를 상실한 자식들 역시 영주귀국자의 범위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 규정에서도 발견되듯, 강제 동원이라는 역사적 사건만이 사할린 한인을 규정하는 조건이 될 수 없고 당연히 '그 배우자나 자손' 역시 이와 동등하 게 규정되어야 하는 제안이 고려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발표한 기준에는 영주귀국자의 자녀들 혹은 귀환 권리를 빼앗긴 이들에 대한 배려가 포함되지 않았다(1945년 8월 15일 이 전에 태어나면 1세대로서의 권리를 지니는 것이 현재 기준이다). 이 기준 을 충족할 수 없는 이들은, 모국이 자행하는 또 다른 무관심과 간접적인 폭 력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피해 사례는 여러 방면에서 보고되고 있다. 형제들 중에서는 나 이 차로 인해 1945년 이전 출생자와 1945년 이후 출생자로 나뉜 경우가 있고, 이로 인해 부모님과 함께 영주 귀국을 할 수 있는 자녀와 그렇지 못 한 자녀로 대분되는 상황이 펼쳐진다. 사할린 이주 당시 부모의 이주가 먼 저 일어나고 그 자식들의 이주가 시작된 경우에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보 인다. 1945년이라는 기준으로 인해, 영주귀국자의 요건이 다르게 적용되 고 그 결과 부모세대나 형 세대의 귀환은 가능하지만, 그 이후 세대―즉 아 들 세대, 동생 세대, 혹은 손자 세대―의 귀환이 불가능해지면서, 가족 간 의 새로운 이산(현상)이 야기되는 새로운 문제를 도출하기도 했다. 이 경 우에는 영주귀국이 또 다른 이산, 이른바 '역 이산' 혹은 '이중 이산'을 초래 했다고 할 수 있다(안미정 339–41).

<남은 여생의 시련>은 이러한 당면 문제를 예각화하여, 사할린 동포들 이 겪는 이중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도록 종용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내비 치고 있다. 이러한 의도를 풀어보면, 일본 정부의 귀환 약속이 간과되면서 불가피하게 사할린에 남아야 했던 이들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또 다른 '시 련'을 안겨준 것이며, 이로 인해 사할린 동포들은 자신들의 숙원을 이루기 [End Page 139] 위해 '남은 여생'이 그리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비굴한 위법 행위를 저 질러야 하는 자로 스스로 전락하고 만다. 인무학은 이러한 비참한 상황을 <남은 여생의 시련>에서 문제적 사안으로 제기한 것이다.

2. 강제 이주의 역사와 역사적 피해의 세대 반복

<남은 여생의 시련>에서 원상모는 자신의 가계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 고 있다.

원상모

아버지 성함은 원복진, 경상북도 유곡리에서 태어나시고 40년에 강제 징용으로 사할린, 그땐 카라프토라고 했죠. 거기 탄광에서 강제 노역하셨습니다.

안학구

모친은?

원상모

이경희, 경상남도 기장군 죽성리 22년에 출생, 40년 사할린에서་큰아버지 가게에서 일하다가 43년에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고་딸을 낳으셨는데 누나는 성홍열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 다음 제་가 태어났구요. 다른 형제들은 없습니다.

안학구

그럼 선생님께서는 1945년 8월 15일에 태어났습니까? (인무학་14, 필자 강조)

원상모의 가계는 경상도에서 발원했다. 원상모의 아버지는 강제 징용으로 사할린에 징집된 사례이고, 원상모의 어머니는 개인 이주를 통해 사할린 에 유입된 경우에 속한다. 이러한 사례에 대해 한층 거시적인 측면에서 관 찰할 필요가 있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자신의 영토로 편입된 사할린으 로 일본인과 조선인을 이주하는 정책을 공히 추진했다. 당시에는 일본인 다음으로 조선인은 사할린 개발을 위해 요긴한 존재로 평가되었다. 그 결 과 이주와 관련된 모집(1939년 '조선모집요강' 시행)과 알선(1942년 '조선 내지 이입 알선 요강' 공표), 계약노동 혹은 강제 징용(1944년 '국민징용령' [End Page 140] 발의), 특수한 형태로서의 이중 징용(강제 징용자들 중에서 일본 내지로 다시 징용된 사례) 등이 자행되었는데,10 원상모의 가계는 이러한 사례 중 강압적 이주 사례를 대변한다.

다만 관련 연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듯, 사할린 이주가 반드시 강제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일부의 연구자들은 가라후토(사할린) 이주에서는 선주민 압박 구도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 에 오히려 지배자로서 일본인 대 피지배자로서 조선인 구도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의견을 내놓을 정도로 사할린 정착 과정에서 강제성이 작용하지 않았다는 주장까지 펴고 있다(정하미 270–71). 이러한 주장을 곁들여, 사 할린 이주 주민들을 '노동형,' '거주형,' '투자형'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 분류법을 참조한다면, 원상모의 모친이 일했다는 '가게(상점)'는 강 제 징용이 아닌 '거주형'이거나 '투자형' 이주의 근거로 볼 수 있다. 그러니 까 이경희(모친)가 사할린으로 이주하여(결혼 이전) 큰아버지 가게에서 일 했다는 진술로 볼 때, 이경희의 가계는 사할린에 투자한 일가(의 결정)를 따라 이주한 형태에 해당하며, 이경희 본인만 놓고 판단하면 거주형 이주 자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일단, 원상모의 아버지는 강제징용의 직접적인 희생자였고, 원상모의 어머니는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이주했다가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 은 부류라고 분류할 수 있다.11 하지만 설령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시행한 이주가 온전히 자발적이었다고 판단해도, 광복 이후 그들(그녀의 가족)이 귀국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것만으로 피해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상 황이었다. 더구나 그녀와 가족들의 이주가 근원적으로 자발적이었다는 지 적에는 몇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사안도 포함된다. 조국을 떠나 타국에 정 착하는 근원적인 요인으로, 일제 강점기에 자행된 경제적 수탈 행위와 식 [End Page 141] 민지라는 가혹 한 현실 요건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상모는 이주 1세대의 이동 정착(강제 이주) 과정에서 탄생한 이주 2 세대에 해당한다. 그 결과 이주 1세대와 2세대로 구성된 사할린 한인 가정 이 탄생했으며, 훗날 원상모와 러시아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으로 이 루어진 이주 3세대(원상모의 딸)도 이러한 가계(도)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된다. 이주 3세대는 이주 2세대의 사할린 정착으로부터 연원한 것이다.

이러한 가계도에서 주목되는 사안은 이주 3세대 원상모의 딸이 한국인 으로서 정체성을 거부하고 러시아(인) 국가(민족)관으로 전면 전향했다는 점이다. 이주 1세대에 속하는 원복진과 이경희는 한국어를 모어이자 모국 어로 사용하는 세대였고, 이주 2세대에 속하는 원상모는 한국어를 모어로 삼고 거주국의 언어로 러시아어를 병행하여 사용한 한국어 모국어 화자였 다면, 3세대에 속하는 원상모의 딸은 러시아어를 모어와 모국어로 삼은 분 리 세대의 대표적인 전형이 된 것이다.12

이러한 가계는 원복진과 이경희에게 모국과 소속 국가가 한국(조선) 하 나였다면, 원상모에게는 모국과 소속 국가는 때로는 혼용되고 때로는 병 행되는 상황이었음을 암시한다(한국과 사할린 어디에서도 거주할 수 있다 는 자세 견지). 물론 이주 3세대에 속하고 '러시아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고수하는 '원상모의 딸'은 모국과 조국을 모두 러시아로 간주하고 있으며, 그녀의 민족관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한국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입장에 머 물고 있다.

이러한 원 씨 일가 3대에 걸친 풍경은 현재 사할린 한인의 입장과 상황 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사할린에는 이주 1세대는 거의 남아 있지 않 고 남은 이들은 한국으로의 귀국을 소망하는 반면, 이주 2세대부터는 한국 어 사용에 능숙하지 못해 한국 정착과 교류에서 상당한 어려움과 문학적 [End Page 142] 갈등을 호소하고 있다(정진아 49–51). 심지어는 실질적으로 한국어를 거 의 구사하지 못하는 세대들이 핏줄과 경제(직업) 논리에 따라 한국에 정착 하기를 희망하면서 외국어로서 한국어를 습득하는 광경도 낯설지 않게 발 견된다. 이러한 현실 풍조와 내부 상황은 과거 이주의 역사에서부터 발원 하여, 결국 러시아의 동화 정책이 강도 높게 부각된 연후에, 최근 문화적 갈등으로 번져나간 결과에 해당한다. 따라서 인무학의 작품 속에 나타나 는 세대 간 문제는 현실 세계에서 이주자들이 겪는 고통과 고민의 단면을 압축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판단해도 무방하다.

이러한 희곡적 설정은 기본적으로 사할린 한인의 관심사이고 공통의 역 사임에 틀림없지만, 미시적 측면에서 보면 극작가 인무학의 가족사이기도 하다. 인무학은 작품의 집필을 영주귀국 후에 단행했다고 술회했다. 그 이 유는 사할린 한인을 국외에 방치한 한국 사회와 정부에 대해 비판의 목소 리를 개진하기 위해서였으며 지금도 그러한 관행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상 황에 책임 있게 개입하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다. 또한 숨은 이유로 자신이 이 작품을 통해 한국어를 자신이 얼마나 사용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 었다고는 속내를 꼽기도 했다.13

극작가 인무학의 의도는 사할린 한인의 처지를 세상에 알리고 그 피해 를 고발하며 희곡 쓰기를 통해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데에 있다고 판단할 근거가 된다. 특히 이러한 창작 의도에 대한 답변 내에는 자신의 가족사에 가해진 위해와 피해를 회복하려는 의지도 작용한다. 인무학의 부친 인해영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강제 징용되었고, 직용 이후 탄광에서 노동하다가 한국어 신문사인 『레닌의 길로』에 입사했 다. 그는 한국어뿐만 아니라, 일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할 수 있는 재원이었 다. 인무학은 부친 인해영에게서 사할린 한인 이주 1세대의 전형적인 모습 을 읽어내고자 했다. [End Page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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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그림 2. 『레닌의 길로』에 수록된 인해영(인 무학의 부친) 부고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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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레닌의 길로』에 수록된 인해영(인 무학의 부친) 부고 기사14

그래서 인무학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더욱 소상하게 간직하고자 했는 데, 이러한 행위는 근원에 대한 기억에 해당할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End Page 144] 의 자료와 기억 수집도 그러하지만, '원복진'이라는 인물을 창조하여 사할 린 한인 이주의 가계의 출발점으로 삼은 점도 그러하다. 아버지의 삶을 기 억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자신이 살아왔던 길을 정리하고 앞으로 그 의 자식 세대가 살아가야 할 길을 예견하기 위해서인데, 이러한 목표를 충 족하기 위해서는 인해영, 혹은 작품 속 원복진 세대에 대한 탐구와 형상화 가 구체적일 필요가 있었다.

위 기사에는 인해영이 '돌린쓰까야' 탄광과, '뵈쯔브또르그'에서 일해야 했던 이주의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러시아 신문인 『레닌의 길로』에 입사 하여 신문기자로 살아야 했던 시간도 기록되어 있다. 기사에서는 인해영을 '열성적 공산당원'이며, '동정심 있고 친절한 동무'로 지칭하기까지 한다.

아마도 러시아 사회가 인해영이라는 강제 탄광 노무자를 기억하는 하나 의 방식이 것이고, 거의 유일한 공식(적) 기록이 아닌가 한다. 문제는 이러 한 기억과 그 너머에 남아 있는 그의 가족, 특히 자식으로서 인무학이 지니 고 있는 상처(심리적 상흔)이다. 그 상처는 보상 받기 요원한 특별한 트라 우마(trauma)라고 할 수 있다. 사할린 한인은 이러한 트라우마를 극복하 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강구해 왔으며, 인무학에게 그 방안 중 하나가 부 친에 대한 기억과 기록의 보존이었으며, 이를 활용한 희곡 쓰기였다고 하 겠다.

인무학은 훗날 '인해영'의 강제 징용을 증언하는 서류를 국가에 제출하 기도 한다. 이 서류를 보면, 이해영이 다카바야시(高林)로 창씨 개명해야 했으며(역사적으로 일본 국적을 취득), 1939년(11월)에는 러시아 사할린 으로 강제 동원되어 탄광에서 노무자로 일해야 했던 경력이 기재되어 있 다. 인해영에게는 첫째 자식 인무학을 비롯하여, 둘째 자식(아들) '인알

〇〇'(1952년 출생), 셋째 자식(딸) '인나△△'(1956년 출생)가 있었다. 이 러한 가족 구성원은 또 다른 이산을 예고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무학 인 1945년 이전 출생자이기 때문에 영주귀국이 가능한 요건을 갖추었다 면, 두 동생은 이러한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nd Page 145]

인무학은 가족사적 구성에서 기인한 또 다른 이산, 즉 '이중 이산'(안미 정 339–41)을 실제 체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실제 체험은 이에 대 한 근원적인 대책을 촉구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희곡 쓰기와 연 극 공연은 그러한 촉구 중 하나이다). 그래서 그는 사할린에 사는 남동생 과 독일에 사는 여동생처럼 사할린 한인 중에는 이러한 이중 이산의 고통 을 겪는 이들이 상당하며, 이를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 장하기에 이른다.15 그리고 이러한 피해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사할린 한 인의 이산이 발생한 근원적인 원인에 대한 대처가 시급하다는 주장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통과 고민의 발원지였던 강제 이주, 특히 강제 징용 에 대해 주의 깊게 재고할 필요가 있다. 본래 사할린 탄광은 본래 러시아 죄수들의 노역장으로, 자원 채굴과 사회적 형벌을 결합하기 위한 조치로 취해진 유배의 현장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러시아 이주 제도를 모방하여, 조선인 노동자, 징용 관련 이주자, 강제 징집자들에게 유배와 같은 이주 정 책을 적용 실천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대상자들을 향한 폭력과 폭언 그리 고 위협과 취조와 체벌이 빈번하게 자행되었으며, 그 결과 부상이나 죽음 에 노출된 사할린 한인들도 그 수효가 적지 않았다. 부상과 질병에 대한 치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흔했고, 일제는 이들의 굶주림과 외로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박승희 518–19).

다만 <남은 여생의 시련>에서는 당시 실상이 구체적으로 반영되지는 않았다. 작품 속 원상모는 아버지 세대의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는 거의 발 언하고 있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어머니 세대의 이주 역사와 삶의 곤란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한인 이주 역사에서 가계의 내력과 함 께 고난의 실체가 함께 밝혀졌다면 더욱 소상한 증언으로서 연극적 의의 가 폭넓게 확보될 수 있었을 것인데, 이러한 점이 누락된 점은 아쉽다고 해 [End Page 146] 야 한다. 다만 그의 텍스트에서 이와 관련된 유효한 단서를 확보할 수는 있다. 그 것은 이러한 이주민들이 어떠한 삶과 역사를 새롭게 써나갔는가에 대한 발견이다.

원상모

그럼 어렸을 때 당신 이름은 울보 아니었나요?

김용희

예, 그걸 어떻게 아시지요?

원상모

예전에 당신의 부친과 모친이 어린애를 데리고 밤에 우리 집을་왔었죠. 당신은 그때 아주 어렸어요. 한 살인가 두 살인가…

김용희

당신 집은 어디에 있었어요?

원상모

뽀베지노촌이었어요.

김용희

엄마가 이야기를 하셨는데 아버지가 경찰에 쫓기다가 뽀베지노་촌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했어요… 그러면 그게 당신 집་이네요?

원상모

아침에 일어나니까 우리 집에 당신의 부친과 모친 그리고 어린་애. 그건 아마 여름인가, 맞어 여름이었어. 애기를 목욕시켜야་하는데, 내가 페치카에 불 때고 물 끓였죠. (인무학 26)

김용희가 어렸을 때 원상모의 집을 방문한 사건이 발생했고, 시간이 흘러 그 과거 사건이 두 사람을 엮어주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설정은 실상 극작 술에서 경계하는 우연적 설정에 해당한다. 우연적 설정은 개연성을 저하 시키기 때문에, 연극적으로는 바람직한 설정으로 평가될 수 없다. 그럼에 도 이 우연한 사건은 몇 가지 측면에서 사할린 한인들의 삶의 방식을 증언 하는 의의를 담고 있다.

그들(사할린 한인)들은 이주자와 경계인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곤란을 해결해주고 상호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 던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할린 한인들의 민족의식과 동료의식은 그 [End Page 147] 들의 힘겨운 삶을 이겨내는 원동력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 가 되고자 했고, '좋은 사람들'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차별 받고 억압 받는 이들이었기에 오히려 서로에게 관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들의 삶은 오히려 국내 거주를 거치면서 한국인의 무 관심과 차별에 직면해야 했고 결국에는 문화적 갈등으로 표면화되기에 이 르렀다. 인무학의 <남은 여생의 시련>은 한국 사회의 냉정함과 경쟁 구도 그리고 경직된 논리에 당황하는 사할린 한인의 혼란과 번민도 동시에 투 영되고 있는데, 이러한 환경 변화에서 오는 갈등 혹은 외부적 압박은 모두 사할린 한인들이 어려운 상황에도 연대의식을 이루었던 과거의 삶의 방식 과는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이러한 냉정한 사회 환경과 의식 세계는 이 작품에서 사할린 한인의 정착과 이주를 가로막는 중대한 요인으로 상정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Ⅳ. 사할린 한인의 국내 귀환과 거주를 위한 모색들

1. 사할린 한인 사회에서의 귀환 운동의 시작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사할린을 점령한 소련(러시아)은 극동 개발을 위해 상당한 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최초에는 이러한 개발 인력을 북한을 통해 수급하고자 했다. 1946년부터 1948년에 걸쳐 북한에 서 사할린으로 상당한 수의 파견 노동자들이 이주했고, 그로 인해 해방 이 후 이주한 북한인들은 1945년 이전부터 거주하던 사할린 한인(원주 한인) 과 성격적으로 다른 한인 그룹을 형성했다. 이들을 약칭하여 '북한 파견 노 동자'로 지칭할 수 있다.

한편 소련 각지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사할린으로 이동되면서, 또 다른 한인 그룹을 형성한다. 이 그룹을 약칭하여 '소련 한인'으로 지칭할 수 있 다. 그러니까 소련 관할 하의 사할린에는 '원주 한인/북한 파견 노동자/소 [End Page 148] 련 한인' 등의 복잡한 한인 그룹이 생겨났는데, 이러한 그룹들은 상호 협력 하기도 했지만 사안에 따라 격렬하게 반목하기도 했다.

특히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에서 주로 이주한 원주 한인과, 북한 파견 노동자 출신 한인 그룹 사이의 대립이 자연스럽게 격화되기에 이르 렀다. 더구나 이러한 현상은 일시에 마무리되지 못하고 자신(들)의 그룹이 더욱 우월하다고 간주하는 감정적 대립을 양산하면서 사할린 한인 사회를 큰 혼란으로 몰아넣었다(조정남 188–89).

이러한 상황에서 귀환 운동의 맹아가 싹튼다. 이질적인 구성원들 사이 에서 반목과 대립이 발생하는 사이에, '조선공산당'이라는 비밀 정당(운동) 이 그 세력을 넓히면서 본격적인 귀국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현재에는 사 할린 한인 사회에서 기원한 조선노동당 창당과 귀환 운동이 정치적으로 복권된 상태이지만, 오랫동안 이 사건은 소련 정부의 탄압과 강제적인 구 속까지 받는 불순 사건으로 매도된 바 있었다. 그 결과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한 4인이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사할린 한인을 해방시켰다는 소련인 의 자부심에 배신감을 야기하여, 소련 당국이 이들의 운동을 정치적으로 탄압할 구실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신정우와 신보균, 김영곤 그리고 권모에 의해 주도되고 학 생들에 의해 조직된 이 단체는 결성 이후 소련 정부의 탄압을 받고 와해되 고 말았지만, 사할린 한인이 견지하고 있었던 모국 귀환의 의지를 가시화 했다는 점에서 사할린 한인 사회의 숙원과 욕망을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 라고 할 것이다(조정남 189–90). 특히 사할린 한인의 귀환 의지가 분명하 게 표출된 사건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역사적 의의를 간과할 수 없는 사건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할린 한인의 귀환 의지와는 별개로, 국내와 일본에서의 귀환 운동은 구체적인 결실을 맺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못했다. 1947년과 1949 년 한국(남한) 내에서의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국제 정세 악화와 국력의 부족으로 인해 이러한 문제 제기는 그야말로 문제 제기의 수준에 끝나고 [End Page 149] 말았다. 사할린 한인 문제의 근원적인 책임이 있는 일본 정부도 1990년대 까지 이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기 때문에, 사할린 한인의 귀 환 문제는 한동안 미제 사건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2. 박노학의 노력과 각종 모색을 통해 본 사할린 한인의 애환

종전 직후 일본인은 집단 귀환을 통해 고국으로 송환 절차를 밟았지만, 일본인에서 제외된 조선인은 사할린에 잔류(억류) 당해야 했다. 일본 정부 는 집단 귀환에서 제외된 일본인 송환 문제를 다시 제기했고, 재수교를 추 진하면서까지 성사시킨 1956년 10월 19일 일소 공동선언에 의거하여, 1957년 8월과 9월에 걸쳐 잔류 일본인의 송환을 재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도 조선인(한국인)은 원칙적으로 송환 대상에서 제외되었지만, 일본인 혼인 관계에 있었던 조선인과 그 자식들의 송환만은 허용되면서, 사할린 억류 한 인 가운데 일부 한인들이 일본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한혜인 173–75).

이러한 차별적인 귀환 문제는 이후 크고 작은 문제들을 낳고 말았다. 물 론 '국적'을 명분으로 내세워 차별적인 귀환 교섭을 추진한 주체는 일본 정 부였기 때문에, 훗날 일본 정부는 사할린 억류 한국인 문제에 대한 직간접 적인 책임(여부)을 추궁 당할 수밖에 없었다(노영돈 123–44). 그럼에도 종 전 이후 대략 1950년대까지의 기간 동안 일본 정부는 자국민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포섭 정책을 실시했고, 이러한 포섭 정책이 1958–1959년에도 재차 시행되어, 사할린에 남아 있던 일본인 그리고 일본인과 결혼한 한인 이 일본으로 송환될 수 있었다. 그 가시적 결과가 일본인과 결혼한 한국인 과 그 자녀 2,345명의 일본 귀환이다(최길성 249).

당시 일본으로 귀환한 한국인이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귀환 정 책의 여파는 한인 사회에 잠재되었던 회귀의 욕망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박길호

어디서 읽었는데, 일본 정부는 해방 후에 사할린에서 일본 사람 들을 모두 데려 갔다데요… 한국 정부는 뭐하는 곳인지 정말, [End Page 150] 자기 국민들을 전부 데려가야지 생일이 무슨 상관이라고. (인무 학 18)

극중 인물의 불평은 한인 사회가 오랫동안 품어온 감정의 응어리를 드러 내고 있다. 외교적으로 볼 때 일본 정부의 자국민 송환 노력은 그 자체로 이기적이고 또 편파적인 정책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자국민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부러 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이로 인해 일본에 의해 자행된 사할린 이주 의 책임이 사면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국민을 보호하고 그들을 정상적인 삶의 영역으로 수용하려는 노력만큼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 아 닐 수 없다.

이와 상반되게도 한국 정부는 거의 아무런 노력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 러한 상황은 국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할린 한인 사회에 집단적 상흔 (트라우마)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더욱 처참 한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이때 이승만 정부는 사할린 한인의 문제를 자국 민의 보호보다는 정권 유지의 도구로 이용하려 했기 때문에, 정책적 효용 성과 정당성마저 확보하지 못했다(한혜인 175). 그러니 이 문제는 한국 정 부의 관심사에서 배제된 채 한동안 외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극중 인물 박길호(사할린 한인으로 원상모의 의동생)의 주장은 사할린 한인들 의 불만 사항을 희곡을 통해 대리 제기한 사례이다.

점증하는 불만과 안일한 대책에 고심하던 사할린 사회에, 소련과 일본 그리고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버려진 사할린 한인 문제를 부각시키 고 실질적인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노력한 민간인이 나타난다. 이 민간인 '박노학'은 본래 1958년 일본인 처와 동반하여 일본으로 귀환한 사할린 한 인이었다. 박노학의 사연은 <남은 여생의 시련>에도 삽입되어 있다.

박길호

저희 집사람이 그러는데 1958년에 박노학이라는 사람이 일본 [End Page 151] 여자와 결혼을 해서 일본으로 넘어 갔답니다…

원상모

그래서?

박길호

그분이 사할린 동포들을 위해 활동을 하다가 일본 국회까지 들 어갔는데 박노학 회장 앞으로 사할린 동포들이 귀국 희망 편지 를 많이 보낸 모양이에요. 당시에 박노학 회장은 국교가 없는 소련과 한국의 헤어진 가족들 연락을 도왔답니다. 1966년 6월 까지 사할린에서 온 편지가 근 7000명이 보낸 거로 박노학 회 장이 귀국 희망자 명부를 작성해서 한국정부에 보냈습니다. 1969년 8월엔 명부가 일본정부와 소련정부에 전달 됐구요. 그 래서 저희 집사람이 혹시나 형님 부모님들께서도 무슨 편지라 도 알아보는 게 좋지 않느냐는데요.

원상모

그건 잘 모르겠고… 그 당시에 난 이르쿠츠크에서 공부하고 있 을 땐데, 보냈을 수도 있겠지.

박길호

한번 알아보세요. 박노학 회장님은 돌아 가셨지만 문서 자료는 남아 있을 수도 있잖아요. 형님, 그걸 한국 적십자사에 한번 부 탁해 보세요. 한국 적십자사와 일본적십자사가 연결되어서 확 인 할 수 있을 거예요.

원상모

그래 알았어. 길호 고맙다. (인무학 31–32, 필자 강조)

남아 있을 수도 있잖아요. 형님, 그걸 한국 적십자사에 한번 부 탁해 보세요. 한국 적십자사와 일본적십자사가 연결되어서 확 인 할 수 있을 거예요. 원상모 그래 알았어. 길호 고맙다. (인무학 31–32, 필자 강조) 전술한 대로, 일본 정부가 추진한 사할린 잔류 국민 재송환 과정에서 박노 학은 일본인 처와 함께 일본으로 송환될 수 있었다(이연식 321). 일본으로 이주한 그는 사할린 한인의 탈출 혹은 귀환 관련 이주 문제를 돕는 민간 활동을 주도하는 인물로 거듭난다. 자신과 동일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할 린 한인들을 구제하고 그들의 귀환을 돕는 일을 자신의 과업으로 상정했 던 것이다. <남은 여생의 시련>에서도 박노학은 원상모의 출생 문제 ―원 상모가 실질적으로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라는 숨겨진 진실 ― 를 해결하는 인물로 설정된다. 그가 그러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박 [End Page 152]

그림 1. 박노학을 위시한 동향인들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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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박노학을 위시한 동향인들의 사진

그림 1. 1950년 가라후토(사할린) 거주 한인 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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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1950년 가라후토(사할린) 거주 한인 들의 모습16

노학이 한국 정부가 감당하지 않으려 했고 일본 정부가 외면했던 송환(이 주) 문제를 민간 차원에서일망정 선구적으로 시행하는 사업을 펼친 이력 때문이다.16

당시 관련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박노학에 대해 한층 자세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박노학 등은 일본인 배우자로 인해 송환 대상에 포함되었지 만, 당시 일본에서 박노학은 환영 받는 존재가 될 수는 없었다. 당시 일본 의 정책은 사할린 억류 한인에 대해 무관심과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것이 었으며, 오히려 본토로 유입되는 외국인들에게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편 1950년대 일본으로 송환 이후, 사할린 한인의 사정은 더욱 악화되 었다. 더구나 사할린 한인들의 북송 문제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박노학 등은 일본에서 '화태억류자귀환동맹'(사할린억류인귀환동맹) 등을 결성하 고 민간 차원의 귀환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그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노력 했지만, 그 효과는 강력하지 못했다. 박노학이 일본으로 귀환했을 당시에 는 일본 정부가 사할린 억류 한인에 대해 소극적인 조치로 일관하던 시절 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협조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 아 [End Page 153] 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문제를 좌시할 수 없었다. 전반적으로 열악한 상황 속에서 화태억류자귀환동맹이 최우선으로 시행한 사업은 귀환희망자 명 부 작성이었다.17

<남은 여생의 시련>에서는 이러한 사연이 소개되어 있고, 이렇게 작성 된 귀환 희망자 숫자가 7,000명(정확하게 6,924명, 1,744가족)이며 박노학 이 이를 위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도 언급되고 있다. 박노학은 일본과 소 련의 국교를 이용하여 사할린 한인들의 편지를 매개하는 역할을 자청했 다. 자연스럽게 사할린 한인들의 사연을 담은 편지들이 박노학에게 전달 되면서, 박노학의 임무는 곧 사할린 한인들의 권리와 귀환 의지를 세상에 알리는 창구이자 통로 역할로 수렴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서신 왕래를 통 해 사할린과 한국 정부를 연결하는 시도가 주목되는데, 정식 수교가 이루 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힘겹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박노학의 노력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사할린 한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처럼 박노학(의 노력)은 사할린 한인들의 귀환 의지를 다시 한 번 점 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사할린 한인에 부정적이던 일본과 소련의 태도 를 결과적으로 완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했으며(비록 긴 시간이 요구되기는 했지만), '북송'으로 갈등을 빚는 한인들의 정확한 전달 의사를 전달하는 대변인 역할도 담당했다. <남은 여생의 시련>은 이러한 박노학의 활동을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소개하면서 동시에, 원상모가 처했던 난처한 상 황(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에 대한 의심)을 해결하는 모티프로 활용하 고자 했다.

안학구

아주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일본 적십자사에서 박노학 회장님의 문서 자료 중에서 원선생님 부모님들이 쓴 편지 복사본을 보 [End Page 154] 내 왔습니다! 그 편지에 원선생님이 1945년 4월 1일에 태어났 다고 나와 있어요.

김용희

아이구!

안학구

그리고 서울 중앙 도서관에서 원선생님 집안 족보도 찾았습니 다. 아마도 부모님들이 아들을 족보에 올린 모양인데 거기에도 같은 생년월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정부에서 이 날짜를 선 생님의 생년월일로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김용희

그럼 우린 추방 안 당하는 겁니까?

안학구

그럼요, 원선생님은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겁니다. (인무학 33, 필자 강조)

박노학의 활동은 사할린 한인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던 한국, 러시아(소련), 일본의 태도를 변모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남 은 여생의 시련>에서는 편지 교환을 통한 증거로 무대화되고 있다. 원상모 의 부모가 박노학에게 전달한 편지를 통해, 원상모가 한국에서 누려야 할 권리가 보장되는 일이 벌어진 셈이다.

이러한 편지는 1966년 한국의 언론에도 소개되어, 이와 관련된 문제의 식을 확산시키는 2차적 역할도 수행했다. 당시 박노학에게 보내진 편지는 사할린에 억류된 한인들이 모국으로의 귀국을 희망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 다. 그래서 편지 자체가 여론의 환기와 관련 당사자들의 결단을 촉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한국 적십자사, 신문사, 방송국 등에다 전하여 주시기 바람니다. 박정이 대통영까지 전해주시기 바람니다. 나는 출생지는 수원군 반월면 일리서 출생하야서 개목에 쇠사슬을 매서 끌여단니듯 나 역시 그와 틀림업시 화 태섬 중에 끌려다 던저노코 해방후 20년 동안 무슨 말 한마디 못드러본 우리 동포들은 유감스럽게 한국 정치가나 사회가들을 만니 비판하는 사 [End Page 155] 람들리 만씀니다. […] 짐승들도 짝을 찾는데 하물며 사람으로서 20년 이 상 짝이 업시 독신생활하는 사람을 구원해서 갓치 귀국해볼까하고 귀국 운동은 만니 해보앗씀니다만 실패로 도라가고 마럿씀니다. 수차 일본정 부에다 편지를 내보고 아엿쓰나 무슨 답이 업 썻으며 1948년 8월 11일 날 귀국 문제을 '쓰달린'에게 편지도 낸 사실도 잇고 이러케 극도적으로 해 보앗쓰나 무슨 결과을 못보고 말든 중에 북조선, 중국, 쏘련 국제형편에 따라서 1963년 11월 17일 날 전수상 '후로쇼위' 씨에게 좌우간 우리 둘레 형편을 알릴 것을 쓸 결심하고 자사한 내용과 반수 이상 독신생활하는 사람들을 자기들 원하는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편지을 썻드니 […]18

전술한 바와 같이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자의 연한을 1945년 8월 15일 로 결정한 것은 여러 문제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러한 문제를 넘을 수 있는 방안과 희망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제시되고 있다. 이것은 사 할린 한인들이 소멸되는 귀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일말의 기대를 지켰다는 측면에서, 사할린 한인들의 내면에 도 사린 희망과 다르지 않다고 해야 한다. 그 중심에 박노학이 있었다. 그의 자발적인 노력이 후대 사할린 한인의 귀환과 권리 회복의 시발점을 형성 했다고 하겠다.

3. 진정한 귀국과 불편한 진실

흥미로운 점은 <남은 여생의 시련>에서는 그토록 갈구했던 원상모의 귀환이 실질적으로 성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상모는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라는 기본적인 요건을 충족하면서(박노학에게 보낸 사연 인 정) 국내 거주가 허락되었지만, 타국에서의 오랜 생활로 인해 불치의 병을 [End Page 156] 얻었고 결국에는 이 병으로 인해 고국에서의 안정적 정착에는 실패하고 만다. 그렇다면 <남은 여생의 시련>에서 원상모의 이러한 귀환(실패)을 유 도한 이유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박길호

(울면서) 형님, 어떻게 이렇게 갈 수 있습니까. 우리를 두고 가 시면…

안학구

우리 처음 만나서 이 집에 오셨을 때 그분은 모국 땅에서 죽겠 다고 그랬어요. 마치 이미 다 알고 그러셨는지…

박길호

어째서 우리 사할린 동포들 운명이 이 모양입니까? 우리가 무 슨 죄가 있다고? 아마도 우리 팔자가 기구한 모양이네요. 좋은 때 태어나지 못하고 그것도 엉뚱한 곳에서…

조명이 천천히 꺼진다. 전 등장인물이 무대로 입장한다.

콧소리로 <아리랑>을 부른다. 조명이 완전히 꺼진다.

목소리

원상모 선생님은 암 말기였습니다. 수술 중 돌아가셨습니다. 김 용희 여사는 한국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김용희여 사는 사할린으로 다시 돌아가게 됐고 원상모 선생 묘에는 매년 방문을 하고 있습니다. (인무학 36)

<남은 여생의 시련>에서 원상모는 서류상으로 한국인 국적을 취득했고, 서류상으로는 귀국하여 자신이 그리던 땅인 모국에 묻히는 바람을 실현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원상모의 귀국은 여러 불편한 진실을 폭 로하고 만다. 전술한 것처럼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 정부의 일방적인 귀국 요건 결정의 문제였고, 이로 인해 자행되는 불법 행위였다.

하지만 그 외에도 사할린 한인 사회의 분열과, 귀국을 희망하는 불온한 이유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러시아 사회에 대한 양면적 의식도 중요한 요인 [End Page 157] 으로 자리 잡고 있다. 러시아(구 소련)은 분명 사할린 한인들을 압박한 주체 이지만 동시에 사할린 한인이 힘겹게 적응했어야 할 삶의 터전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만큼 함부로 버리거나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 중에 한국 정부의 구체적인 대책 부재와 성의 부족 역시 중 요한 이유로 포함될 수 있다. 표면적으로 한국 정부는 영주귀국을 위해 정 착촌을 짓고 그것을 불하하는 정책을 계획하고 이를 실시하는 성의를 보 이는 듯 했다. 그러니까 한국 정부는 사할린 한인의 국내 정착 시설로 '안 산 사할린 고향마을' 등을 건립하고 사할린 한인을 초빙하고 입주를 권고 하는 재외한인 정책의 기본 틀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심각한 결함도 안고 있었다. 일단, 아파트 거주를 이유로 귀환자가 부부여야 한다는 요건을 부가하고 있다(더 정확하게 말 하면 한인 1세대와 결혼한 이들에게도 영주귀국의 권한을 제시한 것이다). 다음, 매달 일정한 생활비를 건네는 것으로 정착의 의무를 전반적으로 다 했다는 형식적인 태도를 고수한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귀환자의 관련 사 무 처리를 일부 관련 단체에 실질적으로 일임하여 2차 피해(김용희에게 가 해진 성적 압박)를 양산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남은 여생의 시련>은 이러 한 2차 피해까지 포함하는 성의 없는 한국 정부의 이주 정책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19

작가 인무학이 숨겨 놓은 전언에는 오랜 세월 동안 자국민의 안전에만 관심을 갖고 사할린 한인을 외면했던 일본이나 한국 정부에 대한 비판이 나, 그리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할린 한인을 거래했던 러시아 나 북한 정부에 대한 항변도 함께 담겨 있다. 그 결과가 원상모의 죽음이 고, 김용희 러시아 복귀(또 다른 귀환)이다. 원상모나 김용희의 정착 실패 는 이러한 항변의 목소리로 간주할 수 있겠다. 그만큼 인무학을 비롯한 사 [End Page 158] 할린 한인의 눈과 귀에는, 대한민국이 취해야했을 진정성 있는 정책이나 태도 변화가 요원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 작품 내에서 주인공을 한국 에서의 삶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고, 여주인공은 이 땅을 떠나야 하는 선 택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각종 사회적 지표를 통해, 실제 현실에서 확인될 수도 있다. 안산 사할린 정착촌 이외에도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은 전국 각 지에서 거주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거주지 가운데 한 지역이 정관 신도 시 임대아파트였다. 사할린 한인 126명이 2009년 1월 부산 정관으로 이주 한 바 있다. 하지만 거주 시설 만족도 조사에서 상당히 높은 비율인 68.5% 의 답변이 '보통이다'로, 15%의 답변이 '불만족스럽다'로, 그리고 5%의 답변 이 '매우 불만족스럽다'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국내에 마련된 거주 공간 에 대한 만족도가 그렇게 높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배수한 299–300).

사회과학적 조사 방법을 통한 설문에서 확인되는 만족도는 단순한 자료 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정착촌에 대한 1차적인 판단 이전에 이러한 영주 귀국을 위한 한국 정부의 기본적인 태도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 무학은 창작을 통해 숨은 공로자 박노학에게는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면서 도, 대한민국의 현재 이주 정책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상 황도 넓은 의미에서는 동일한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사할린 한인의 영주 귀국을 비롯한 포용 정책에서, 한국 정부와 국민들은 '고향을 떠나야 했고 강제 유폐되어야 했던 사할린 한인'의 내면과 속사정을 들여다 볼 준비를 미처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Ⅴ. <남은 여생의 시련>에서 나타난 사할린 한인의 문제와 갈등

인무학의 <남은 여생의 시련>에는 디아스포라 문학이 지니고 있는 기 본적 모티프와 화소를 함축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기본적 모티프로 [End Page 159] 이주 국가(모국)의 비극적 역사, 그로 인해 발생하는 집단 이주의 실체, 모 국 귀환이 차단된 상태에서 정립되는 상상적 모국관, 거주 지역에서의 차 별과 주변화(혹은 동화) 현상, 모국을 향한 그리움과 귀환에의 갈망, 그리 고 귀환 이후의 문화적 갈등 등을 꼽을 수 있다. 사실 디아스포라의 원인 은 침략 혹은 박해로부터의 도피, 기아와 곤란으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경 제적 부의 창출로 요약될 수 있는데(전형권 외 136), 이러한 요인들은 디 아스포라 문학의 기본 화소들로 작동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민족 디아 스포라 문학은, 재외한인의 유민화 현상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것 은 재외한인의 유민화가 주로 침략으로부터의 도피 혹은 기아와 곤란으로 부터의 탈출에 기인하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관련 연구가 아직은 충분히 시행되었다고 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조사 된 바에 의거하면, 사할린 한인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일제 의 압박과 강제 혹은 기아와 곤란으로부터 도피이자 탈출을 모색하지 않 을 수 없는 처지였고, 다소 예외적인 상황에서 부의 창출을 꿈꾸었다고 해 도 그 선택이 일제 강점이라는 현실적 억압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역사적 정황은 인무학의 <남은 여생의 시련>에 서 원상모의 가계와 김용희의 가계(설정)로부터 암시되고 있다. 강제 징용 으로 요약되는 폭력적 현실은 일제 강점의 비극적 역사와 집단 이주의 실 체를 결합하여 참담한 시대적 상황을 증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원상모와 김용희의 가계는 무엇보다 효과적인 현실(역사) 고발 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 작품에서 김용희와 원상모의 결혼(이주를 위한 계약 결혼)에는 전사 (前史)가 설정되어 있다. 최초 김용희는 결혼을 통해 북한이라는 모국으로 편입되고자 했고, 원상모는 러시아 여성과의 결혼을 통해 자신이 속한 국 가였던 러시아로의 동화를 적어도 꺼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용희의 모 국 편입은 '상상적 모국관'의 허상을 보여주며 끝나고 말았고, 원상모의 적 극적인 편입 의지는 '주변화'로 인해 결국 모국의 새로운 정립을 종용하는 [End Page 160] 결과를 낳고 말았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원상모와 김용희는 나름의 방식으로 모국으로서의 한국을 설정하고 이를 현실에서 해결하고자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김용 희가 모국(처음에는 북한)으로의 편입이라는 해결책을 염두에 두었다면, 원상모는 모국이 아닌 국가(러시아)의 국민으로 재편성되려는 다른 해결 책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선택은 모두 실패로 마무리되었다. 그 결과 김용희는 체제 부적응자로서 아들을 목도해야 했고, 원상모는 자 신을 주변인으로 밀어내는 딸의 선택을 수용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새로운 모국관을 정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원상 모와 김용희는 자신들의 실패를 발판으로 남한(한국)이라는 사회로의 새 로운 진입을 설계한다. 이 설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은 '결혼'이었 다. 두 사람은 각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위장 결혼을 시행하면 자신들의 상실된 정체성을 되찾고 평소 꿈꾸던 모국으로의 귀환도 성사시킬 수 있 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남은 여생의 시련>의 도입부는 이러한 귀환이 일차적으로―그러니까 표면적으로 성공한 상태를 그리고 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은 부부가 위 장하여 한국의 집단촌에 입성하는 데에 성공했고, 적어도 기존 주체 사회 에서의 차별에서 벗어나는 듯 보였다. 두 사람이 러시아인들의 주류 민족 과의 대립이나 기존 질서와의 길항에서 적어도 탈피한 것처럼 보였기 때 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착에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작품에 서는 '한종희'라는 교활한 숙적을 배치하고, 그의 농간에 의해 이러한 곤란 이 증폭되는 서사를 활용하여 이를 장면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더욱 근본 적인 난관은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여야 한다는 영주귀국 요건과, 대한민국이 사할린 한인을 대우하는 경직된 방식(각종 정책)에서 연원했다. 즉 한국이라는 모국이 과연 사할린 한인 유민의 이상적 모국으로서의 자세 와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End Page 161]

이와 함께, 원상모/김용희 부부가 이주지 사할린으로부터 받은 불이익 과 괴로움 그리고 차별 대우와 보상 욕구도 간과할 수 없는 난관으로 작용 했다. 원상모는 한국이 아닌 러시아로의 복귀 역시 마다하지 않고 있으며 김용희 역시 아들 문제만 해결될 수 있다면 한국이 아닌 러시아에서 거주 하는 것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하면, 이주자로서 '역사의 난파자'가 되어야 했던 원 상모와 김용희는 모두 모국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과 귀환 의식을 절대적 으로 견지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이러한 그리움과 귀환 의식을 형성 하는 원인의 상당 부분이 사할린이라는 거주지에 대한 불만과 탈출 욕구에 서 발원한 사실도 은근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모국인 한국이 귀환처가 아니라 도피처였으며,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고향이 아니라 상대 적인 측면에서의 유리한 거주지로 선택되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20

물론 본론에서 논구한 대로, 모국으로서 대한민국은 잃어버린 국민에 대한 책임감을 통감하고 있지 못하며, 현실의 문제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마음가짐을 견지하고 있지 못하다. 당연하게도 모국을 향한 귀환 의식에 사로잡힌 이주자들에게, 대한민국은 신뢰감을 주는 보호자가 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것은 사할린 한인들에게 귀환의 권리를 빼앗고 마는 중 대한 한계에 해당한다.

더구나 양자(모국과 귀환 희망자)의 의식이 충분히 숙성되지 못한 상황 에서 감행된 제한된 이주와 이중 이산은 결국 문화적, 사회적, 제도적 갈등 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남은 여생의 시련>에서 김용희/원상모 부부는 상대방을 향한 갈등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 제도와의 길항 을 경험하기도 한다. 결국 양자의 갈등은 이들 부부가 한국에 머무는 것을 [End Page 162] 방해하는 힘으로 작동한 셈이다.

이러한 갈등과 길항의 과정에는 귀환자가 가져야 할 권리에 대해 문제 의식이 투입되기 마련이고, 동시에 귀환자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편협함과 무관심이 투영되기도 한다. 그 어느 쪽이든 한국 사회가 사할린 한인의 귀 환에 대해 역사적 책임을 제대로 지지 못하고 있으며 동시에 귀환자의 권리 가 박탈되는 역사적 상처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거꾸로 말하면 귀환자의 권리를 보존하기 위한 전 사회적인 각성이 필 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그들-귀환자(혹은 귀환 희망자)에 대한 관심과 염 려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통념이 마련된다. 인무학의 희곡 <남은 여생의 시 련>은 이러한 각성과 통념을 촉구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은 여생 의 시련>에 직간접적으로 담겨 있는 일련의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사할린 한인과 관련하여, 한국 사회는 19세기 말 혹은 20세기 초부터 '역사적 비극 → 집단적 이주 → 귀환 기회 차단 → 거주 국가에서의 차 별 → 상상적 모국관 정립 → 귀환의 일차적 실현 → 문화적 갈등과 실질적 정착의 실패(혹은 곤란)'라는 역사적 루트를 밟아왔으며, 이러한 일련의 과 정은 현재까지 그 문제점을 낳고 있다. 이러한 심리적 패턴이 적어도 사할 린 한인들에게는 현실적인 문제로 잔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불안감이 희 곡 <남은 여생의 시련>을 통해 문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 으로 사할린 한인의 문제가 한국 사회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역사라는 점 을 인정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와 하등 다를 바 없다고도 할 수 있다. [End Page 163]

Namseok Kim
Pukyong National University
Namseok Kim

Namseok KIM is currently a professor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at Pukyong National University and is working as a critic in this area. He is interested in the dramatic works and the lives of ethnic Koreans living in China and central Asia and also takes an interest in the lives and dramatic works of Koreans in Sakhalin. He understands the people who are living nomadic lives abroad or are unable to return to Korea and works with the hope of being able to help them and their literature in any way. darkjedi@dreamwiz.com

Received: 24 April 2017
Reviewed: 8 June 2017
Accepted: 18 June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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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1. 이 논문은 2016년 8월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가 해외(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공동주최한 학술대회 "CIS 고려인문학과 한국문학"에서 본인이 발표했던 「사할린 한인의 귀환과 귀환자의 권리―인문학의 <남은 여생의 시련>을 중심으로」를 수정 보완하고 이후 확대 개고한 연구임을 밝혀둔다.

2. Cf. 조정남; 김승일. 「사할린 한인 미귀환 문제의 역사적 접근과 제언」. 『한국근현대사연 구』, 38집, 2006, pp. 185–205; 이연식.

3. Cf. 안미정.

4. Cf. 노영돈.

5. Cf. 김민영. 「사할린 한인의 이주와 노동」. 『국제지역연구』, 4권, 1호, 2000, pp. 23–52; 조 재순.

6. Cf. 최길성; 이은숙 외; 박승희; 정진아.

7. Cf. 박경용. 「사할린 한인 김옥자의 삶과 디아스포라 생활사 ―'기억의 환기'를 통한 구술생 애사 방법을 중심으로」. 『디아스포라연구』, 7권, 1호, 전남대학교 세계한상문화연구단, 2013, pp. 163 – 96.

8. Cf. 한남제. 「문학사회학의 가능성」. 『한국사회학』, 31권, 1호, 1997, pp. 3–4; 김태환. 「장 르의 사회학에 관한 시론」. 『카프카 연구』, 18집, 2007, pp. 193–94; 서은주. 「1970년대 문 학사회학의 담론 지형」. 『현대문학의 연구』, 45집, 한국문학연구회, 2011, pp. 475–79.

9. 본 연구에서 분석 저본으로 삼은 희곡 대본은 인무학이 창작하고 극단 이그라에서 공연 대 본으로 정리한 판본이다.

10. Cf. 최길성; 박승희.

11. 그녀와 가족의 이주가 자발적이었다고 양보한다고 해도, 광복 이후 귀국할 수 없는 환경을 내몰린 것은 전형적인 피해자의 요건이었다.

12. 본 연구에서 원상모 가족 세대에 대한 담론은 다음의 논문을 참조했다. Cf. 김남석. 「<남은 여생의 시련>을 통해 본 사할린 한인의 역사적 상처와 치유로서의 희곡 쓰기」. 『문학예술 치료』, 2016, pp. 95–100.

13. Cf. 인무학. 연구자와의 서면 인터뷰, 2016년 8월 5일.

14. 1961년부터 쏘련공산당원이며 쏘련기자동맹 맹원이며 『레닌의 길로』지 이전 사원이었던 인 혜영이 7월 9일 불의에 사망하였다. 인 혜영은 1921년에 출생하였다. 그는 남부 싸할린이 쏘련군대에 의해 해방된 후 '돌린쓰 까야' 탄광에서, 다음 뵈쯔브또르그에서 일하였다. 그 후 15년 동안 그는 싸할린민주당위원회 기관지인 『레닌의 길로』 신문사에서 일하였다. 인 혜영은 직무를 성실하게 실행함에 자기의 모든 힘과 지식을 이바지하였으며 높은 정치 적 및 실무적 품성을 발휘하였다. 『레닌의 길로』 쉰문사 보도부, 서한부 부장, 편집국 기자로 사업하면서 그는 토농흥신열성 자들을 증가시키며 독자들과 쉰문의 련계를 강화함매 대하여 배려하였다. 그는 쏘베트 생 활양식, 공산당의 레닌적 민족정책의 승리에 대하여 수완 있게 선전하였으며 부루죠아사 상 및 비도덕적 현상과 견결히 투쟁하였다. 인 혜영은 수차 영예표창장으로 표창되었다. 열성적 공산당원이며 동정심 있고 친절한 동무인 인 혜영에 대한 신성한 추억은 우리의 심 장 속에 항상 살아있을 것이다. 『레닌의 길로』지 사원 일동

15. Cf. 인무학. 연구자와의 서면 인터뷰, 2016년 8월 6일.

16. 그림 3과 그림 4는 사할린 한인들의 모습과 이들의 탈출을 도왔던 박노학과 그 일행의 사진.

17. 김성종 pp. 201–03; 이연식 pp. 321–28.

18. 1966년 1월 『동아일보』에 소개된 사할린 억류 한인의 편지와 그 정황. 박노학에게 보내는 사할린 한인의 편지(『동아일보』 1966년 1월 18일). 당시 맞춤법을 그대로 노출하여 인용 하였다.

19. 관련 연구에 따르면 정착 한인들의 실질적인 문제와 고민은 생활고 뿐만 아니라, 노인문제 에서 파생되는 외로움과 질병 그리고 고립 현상(게토화 현상)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Cf. 우복남.

20. 영주귀국자의 귀국 이유를 묻는 설문에 절반에 가까운 44.7%가 '고향 친지가 그리워서'라 고 대답했지만,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13.1%)나 '러시아에서의 생활이 어려워 서'(8.8%)라는 답변도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20% 이상의 답변에서 귀국의 이유가 모국에 있다기보다는 자신이 살았던 러시아(사할린)에 있다는 의견으로 볼 수 있다. Cf. 배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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