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적 자율 지대와 법 바깥의 주체

Abstract

Narratives of historical shifts by a collective, united subject such as a class tend to denunciate small-scale, diversified struggles. But as we know, revolutions have no history of success and others have no history of being fairly evaluated. This article aims at examining and evaluating one of the 'others,' Temporary Autonomous Zones conceptualized by Hakim Bey, who proposed to give up a direct confrontation with the power which became a simulation and to constitute sporadic and temporary communities as a means of struggle. It has been criticized as an escapism by political critiques such as Bookchin and Armaitage, or even as giving up of the struggle itself. But opening up a T.A.Z. never amounts to a mere escapism, but an experiment with producing subjects outside the law who do not conform to the existing system. Conflicts and antagonisms which would remain even after a revolution around a single theme e.g. economic class could disappear in a T.A.Z. For example, people hanging together regardless of their ages are establishing a T.A.Z. which works outside the ageist system. Although T.A.Z. guarantees no utopia without any oppression, it shows possibilities of living alternatively. Rather than being a negation of the need for a revolution, even not of its possibility, T.A.Z. is an urge for a subject to revolutionize oneself first, which is possible now-and-here, even without a revolution. It is an experiment and an exercise for a total revolution which should abolish not just an economic oppression but also any kind of it.

Keywords

Temporary Autonomous Zone, Hakim Bey, anarchism, ontological anarchy, revolutionary politics

Ⅰ. 들어가며

(대개는 계급으로 표상되는) 거대한 집단 주체가 국가에 맞서 혁명을 일으키고 마침내 권력을 탈취해 새로운 체제를 선포하는 것은 급진/진보 정치의 흔한 서사 중 하나이다. 중국, 소련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이 서사는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적 대를 표현하지 않는 다양한 실천 양식들의 가치를 깎아낼 뿐 아니라 소위 '주변적 집단'이나 '하위주체'로 불리는 이들을 정치적 진보의 서사에서 배 제하는 부작용까지도 갖고 있다. 계급이라는 정체성에 기대지 않은 주체 들의, 정부를 공격하는 대신 새로운 영역을 창출해 내려는, 그리고 그 영역 의 (국가와 같은 식의) 영속성을 지키려 하지 않는 운동들은 쉽사리 평가 절하된다. 이 글에서는 그런 운동의 대표적인 형태로서, 하킴 베이(Hakim Bey)1가 제안한 "일시적 자율 지대"(Temporary Autonomous Zone, [End Page 105] TAZ) 구상을 검토해 봄으로써 그 서사의 문제점과 대안적인 운동의 가치 를 밝혀 보고자 한다.

하킴 베이는 1985년 저작 『T. A. Z.: 일시적 자율 지대, 존재론적 아나 키, 시적 테러리즘』2의 한 장을 이 구상에 할애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일 시적 자율 지대를 ―"역사가들이 실패한 혁명들을 가리키는 데에 쓰이는 말"인―"봉기"로 칭하며 "국가와 직접적으로 교전하지 않는 봉기와 같은" 것으로, "(땅의, 시간의, 상상의) 한 영역을 해방시키고는 국가가 그것을 파 괴하기 전에 해산해 다른 곳에서/다른 때에 재형성되는 게릴라전"으로 제 시한다(T.A. Z. 145; 147). 여기에는 계급과 같은 단일한 주체가 요구되지 않으며,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159) 또한 요구되지 않는다. 제프 샨츠 ( Jeff Shantz)는 이 구상이 아나키스트 운동, 특히 90년대 북미 전역에 설 립되었던 도시 내 아나키스트 센터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당대 아나 키즘 논의에서 가장 뜨거운 논제였다고 평한다(재인용. Sellars 97).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혁명적 계급 정치에 반하는 것으로서 많은 [End Page 106] 비판을 받아 왔다. 예컨대 닐라 슐로이닝(Neala Schleuning)은 일시적 자 율 지대를 비롯한 하킴 베이의 제안들을 "무작위적 저항 행동의 정치학"으 로 규정하며 개인주의적, 포스트모던 아나키즘의 한 조류로서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구조화된 사회 모델들과 그 집단적 으로 동의된 자유들 대신 오직 무작위적 개인 혹은 부유하는 저항자 집단 들이 성취할 수 있을 파편화된 자유만을 제공"하며, "일시적이라는 본성으 로 인해, 그 정치적 효과는 아마도 평가 불가능하다."(Schleuning 213).

이러한 식의 평가는 과연 정당한가, 나아가 이런 틀로 평가하는 것이 정 당할 수 있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혁명은 늘 강조되어 왔음에도 불구하 고 성공한 적이 없다. 오히려 표면상의 성공 후에 반동적 성격이 강화된 사례만을 남겼을 뿐이다. 그럼에도 혁명의 허상을 잣대로 삼아 혁명에 '복 무'하지 않는 구상을 평가절하해도 좋은 것일까? 명시적인 성과 ― 새로운 체제의 수립과 같은 ― 를 산출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 효과는 평가 불가 능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일시적 자율 지대 구상의 특성들을 밝 히는 일과 이에 제기된 비판을 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 본론에서는 먼저 하킴 베이의 글을 토대로 일시적 자율 지대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정리하 는 데에 한 장을, 또 존 아미티지( John Armitage) 등이 제기한 주요한 비 판을 확인하는 데에 한 장을 할애할 것이다. 세 번째 장에서는 그 비판들 에 답하는 방식으로 일시적 자율 지대가 상당한 정치적 필요성과 의미를 가짐을 주장할 것이다.

Ⅱ. 하킴 베이: 일시적 자율 지대

하킴 베이는 일시적 자율 지대라는 개념에 책의 한 장을 할애하면서도 "우리는 TAZ를 정의하려는, 혹은 그것이 창조되기 위한 필연적 방식에 관 한 도그마를 정교화하려는 그 어떤 욕망도 갖고 있지 않다"고 단언하며, 애 [End Page 107] 초에 이것이 "하나의 제안, 거의 시적 상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 (T.A.Z. 165; 142). 그는 구체적인 정의와 방법론을 제시하는 대신 앞에서 인용한 것과 같은 단편적인 규정들과 함께 그 실례들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 실례들이란 법망을 피해 형성된 18세기 해적 공동체들과 그 연결망,4 디너파티, 나이트클럽 등 진보적 정치와는 무관해 보이는 것들을 다수 포 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몇몇 규정들을 섬세히 읽어 내는 한편 다분히 비유적이고 과장된 그의 어법을 고려한다면 정치적 행동으로서의 일시적 자율 지대를 이해할 수 있다.

일시적 자율 지대를 "봉기"로 칭하는 것이 "실패한 혁명"의 복권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국가와 직접 교전하지 않는"다는 규정은 보다 직접적으 로 그의 사회 인식과 지향점을 드러낸다. 그는 "왜 구태여 모든 의미를 잃 고 순전한 시뮬라시옹이 되어 버린 '권력'과 대적할 것인가?" 하고 묻는다 (181).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권력이 시뮬라시옹이라면 그 권 력의 산물은 가상적인 것이다. 권력의 강력한 억압과 그것을 토대로 한 착 취를 그저 가상이라고 말해도 좋은가? 그런데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 즉 "시뮬라시옹의 사회"를 그는 "일상생활의 놀라움(marvelousness)에 대한 모든 지각을 무력화하는 체제"로 칭하며 그 다른 이름으로 "스펙터클"을 들고 있다(119–20). 상황주의자들의 용어인 스펙터클은 "이미지들의 집합 이 아니라, 이미지로써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를 가리킨다. 스펙 터클은 "사회 자체로서, 사회의 부분으로서, 통합의 도구로서 스스로를 제시 한다."(Debord 10–11). 이렇게 본다면 순전한 시뮬라시옹이 되어 버린 권 력이란 굳이 대적할 필요가 없는 무언가가 아니라 오히려 대적 불가능한 무언가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권력이란 사람들을 단순히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논리를 따르는 존재로서 생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nd Page 108] 그는 18세기 해적 공동체의 일부가 "의식적으로 법 바깥에 사는 작은 사 회들"을 지지했다고 쓴다(T.A.Z. 141, 필자 강조). 시뮬라시옹, 스펙터클 이 된 권력이 사람들 간의 관계를 규정하며 그 관계는 사람들을 스스로의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면, 다시 말해 사람들의 세계를 지각하고 그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 자체가 이미 권력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그 관계 속에 서 그것에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시적 자율 지대가 국가와 직접적 으로 교전하지 않는다는 것, 국가가 인지하지 못하는 영역을 창조한다는 것은 법 바깥의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며 법 바깥의 주체를 만든다는 것이 다. 법 바깥에서 이들은 단순히 "무작위적인" 존재로 남지 않는다. "일시적 자율 지대의 원형"인 해적 공동체에 대해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노예제, 농노제, 인종차별, 불관용과 같은 제국주의의 끔찍한 "이익"으로 부터, 징용이라는 고문과 죽음만도 못한 농장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해적 들은 인디언의 방식을 택했으며 카리브인들과 결혼했고 흑인과 스페인 인을 동등하게 받아들였으며 모든 국적을 거부했고 자신들의 선장을 민 주적으로 선출했으며 '자연 상태'로 돌아갔다. 스스로를 '전세계와 전쟁 중'으로 선포하면서 그들은 '조약(Articles)'이라 불린 상호 계약 하에 약 탈 항해를 했는데, 이 조약들은 모든 구성원이 충분한 할당량을 받으며 선장은 대개 1¼ 혹은 1½의 할당량만을 받을 정도로 평등주의적이었다. 태형과 체벌은 금지되었다 ― 다툼은 투표 혹은 결투 규칙에 따라 해결되 었다.

(167–68)

권력에 의해 생산되기를 멈추고 자율성을 획득한 주체들은 법 바깥의 자 율 지대에서 단순한 개인으로 남지 않는다. "통합의 도구"인 스펙터클에서 벗어난 개인들은 억압적인 제국의 법 ― 노예제와 같은 ― 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국적, 인종 등 체제가 부여하는 (대개는 의무가 부과되는) 이름표 까지를 모두 버리고 평등한 자연인으로서 새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End Page 109] 러한 관계맺음은 무작위적인 자연인을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주체로 재형 성한다.

일시적 자율 지대는 이런 의미에서 "사라짐의 전술"로 칭해진다

(181).

정치에 반대되는 대규모의 소극적 행동은 그저 투표하지 않는 것이며, '무관심'(즉 피곤한 스펙터클에 대한 건강한 질림)은 국민의 반 이상을 투 표하지 않도록 만든다. […] 여기에는 적극적 반대항이 있다. 정치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네트워킹'은 사회의 다양한 층위에서 실천되며 비위계적 인 조직은 아나키스트 운동 외의 영역에서도 대중성을 갖고 있다.

(182)

[그리고 이런 식의 적극적 행동은] 전통적인 혁명적 대적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정도의 비가시성을 갖는[다].

(185)

이 "사라짐"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권력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 ― 각 자가 권력에 순응하는 주체로 조작되지 않는 곳에서 권력과 반대되는 정 치를 형성하는 행위이다. 일시적 자율 지대는 "그저 통제 너머가 아니라, […] 노예화 행위로서의 응시와 호명 너머에" 존재함으로써 법 바깥의 주체 를 형성하며 "국가의 이해력 너머에, 국가의 보는 능력 너머에" 존재하고 또한 국가의 인지 전에 사라져 자리를 옮김으로써 "응시와 호명"에 의한 포섭을 피하는 것이다(185–86).

'일시적' 자율 지대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그 일시성은 필수적인 것은 아님을 또한 보아야 한다. 자율 지대의 일시성은 자신의 본성 때문이 아니 라 끊임없이 확장되어 모든 것을 포섭하는 체제의 본성5상 요구되는 것이 [End Page 110] 다. 오히려 "어떤 작은 TAZ들은 두메산골의 자치구역들(enclaves)처럼,인지되지 않았기에 평생 유지되었다."(147). "영구적 자율 지대"를 말해도 좋을 정도로 이 일시성은 상대적인 규정이며, 자율성 또한 정도차를 가질 수 있다. "어쨌거나 약간의 자율성이라도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핵심적인 것은 일시적 자율 지대는 반드시 "물리적인 공간" 속 에 실존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순전한 구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 어떤 일상 ― 실재 ― 도 경험될 수 없다고 하킴 베이는 주장한다. 아무리 거창한 기획이 있어도 그것이 작은 규모로라도 실현되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스펙터클 사회 속에서 실재와 유리된 채 "매개된 삶"을 살 게 된다는 것이다(T.A.Z.2nd xi–xii).

마지막으로, 이러한 일시적 자율 지대를 통해 일상을 회복하고 법 바깥 의 주체로 재탄생하는 것, 즉 일시적 자율 지대라는 운동의 주체가 누구인 지를 확인하기로 하자. 여기에는 긴 논의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누구나' 이기 때문이다. 일시적 자율 지대는 열려 있다. 그러나 일시적 자율 지대가 열려 있다는 것은 단순히 무작위적 개인들을 모두 수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킴 베이는 "디너파티는 이미 낡은 사회의 껍질 안에서 형성되고 있는 새 사회의 씨앗"이라며, 모든 종류의 파티는 "일종의 '해방된 지대' 혹은 적어도 잠재적인 TAZ"라고 주장하고 이렇게 덧붙인다. "디너파티처럼 몇 명의 친 구들에게만 열려 있건, 혹은 히피족 모임처럼 수천 명의 참석자에게 열려 [End Page 111] 있건 파티는 항상 열려 있다. '질서지워진'(ordered) 것이 아니기 때문이 다." (T.A.Z. 152–53). 요컨대 일시적 자율 지대는 특정한 주체 ― 예컨대 기성 사회에서 갖고 있는 파급력의 수준이나 그 속에서 받고 있는 억압의 종류에 따라 구분될 수 있을 ― 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일시적 자율 지대는 권력의 시뮬라시옹을 벗어나 일상을 되찾고자 하는, 그리고 그런 서로와 함께 하고자 하는 누구에 의해서든 형성될 수 있는 영역이다.6

Ⅲ. 반-혁명으로서의 T.A.Z.?

서두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제시된 닐라 슐로이닝의 비판을 언급했지만, 그가 또한 인용하고 있듯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 존 아미티지 등 [End Page 112] 은 하킴 베이로부터 영감을 받은 운동들과 논의들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 던 시기였던 90년대에 이미 일시적 자율 지대 개념에 대한 강력한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북친은 하킴 베이의 "베이"를 일반명사로 취급하며 ― 그는 이 단어가 "장"(chief) 혹은 "왕자"를 뜻한다고 부연한다7 ― 순전한 시뮬라 시옹이 되어 버린 '권력'과 왜 굳이 맞설 것이냐는 하킴 베이의 물음을 인 용하고는 비난에 가까운 답을 덧붙인다.

따옴표 친 권력? 순전한 '시뮬라시옹'? 보스니아에서 화력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순전히 '시뮬라시옹'이라면 우리는 정말로 매우 안전하고도 편 안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게다! 꾸준히 증폭되는 근대적 삶의 사회적 병리 현상들이 불편한 독자는 아마도 '현실은 우리에게 '혁명'을 기다리기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원하기를 포기하라고 요구한다'는 왕자님 (the Bey)의 위엄 어린 생각에 위로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말은 우리 에게 열반의 평온을 즐기라고 유혹하는 것인가?

(Bookchin 15)

여기서 읽히듯, 북친은 하킴 베이가 정치 현실과 혁명 정치 모두를 버리고 '일시적 자율 지대'로의 침잠을 말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혁명의 대의에 몸바친 이들을 조롱하고 있다는 평가를 비롯해 비슷한 어조의 비판을 이 어간 후 북친은 일시성 또한 강력히 비판한다. "TAZ는 지나가는 사건, 순 간적인 오르가즘, '권력 의지'의 잠깐의 표현으로, 사실상 개인의 개성, 주 체성,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형성에 있어 어떤 흔적이든 남길 수 있는 능력 에 있어 눈에 띄게 무력하며, 사건들과 현실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는 더 하다"는 것이다(Bookchin 17). 사회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을 버리고 권력과의 대적을 피해 '자율적인' 공간으로 숨어드는 듯 보이는 하킴 베이 의 논의에 대해 북친은 최종적으로 그것이 아나키즘에 유해하다는, 그것 [End Page 113] 이 "아나키즘이라는 말 자체를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무해한 것 으로 ― 모든 세대의 프티부르주아를 애무하는 시쳇말(fad)로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Bookchin 18).

어조는 상대적으로 차분하지만, 몇 년 후 존 아미티지 또한 계급 문제를 중심으로 강력한 비판을 제기한다. 그는 "요즘의 통념과는 반대로 베이의 정치적 문화적 이론은 지적으로 보수적이자, 딱히 급진적이지 않다고 주 장"하며 그가 "계급 투쟁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현대 자유지상주의적 사유, 다양한 형태의 정치적 조직, 행동, 그리고 일상 생활의 정치학의 본성과 의 미의 많은 부분을 유용하고 있다"고 평한다(Armitage 115). 아미티지는 마 르크스주의의 전통을 좇아 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계급투쟁을 그 방법으 로 보며 다음과 같이 묻는다.

문제는 평범한 마약쟁이의 투쟁이 어떻게 [하킴 베이가 자신과 연관 짓 고 있는] 상황주의나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문화적 기획과 연관되는가 하는 것이다. 그게 누구든지 분명, 상황주의자들에 의해 시 작된 일상생활의 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 주체성을 재주장하려 한 자율 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노력을 계급투쟁과 같은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개념들 없이 달성할 수 있는 이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121)

계급 개념이 폐기되었다면 일시적 자율 지대의 주체는 누구인가. 아미티 지는 하킴 베이가 단지 기존의 급진 정치 이론을 유용할 뿐 실효성 있는 조직체를 제안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나아가 그의 이후 저작 중 하나인 『직접주의』 (Immediatism )에서 언급되는 중국의 비밀 결사 '통'에 가서는

"그의 정치 조직 및 저항 형태는 엄격히 사적인 문제"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가 계급은 물론 다른 형태의 조직체 역시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시 상황주의자들과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언급하며, 전자는 노동자 평의회의 결성을 주장했고 후자는 일상생활과 개인적 주체성의 탈환 뿐 [End Page 114] 아니라 "사회적 공장과 자본주의적 동질성의 파괴라는 집단적 이해를 가 진 대규모의 ― 주로 주변적인 ― 그룹들 사이의 통일성"이라는 지향을 가졌 다고 선을 긋는다. 이들의 경우에서와 달리 "베이의 글들을 지배하는 것은 정치적, 문화적 행동과 조직화에서의 사회적 계급들의 역할에 대한 거부" 이며 "사실상 그의 일상생활의 혁명가들은 […] 고독한 인물들"이라는 것이 그의 평가이다(Armitage 122). 아미티지가 보기에 이러한 하킴 베이의 이 론이 구제될 수 있는 길은 전향적인 전환뿐이다. 그는 하킴 베이가 이후의 저작에서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늦게나마 깨달았다고, "정치적 문화적 투 쟁에 관한 이론적 입장을 바꾸었다"고 주장한다(Armitage 123). 『밀레니 엄』(Millemium , 1996)에서 하킴 베이가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현전의 혹 은 연대의 힘은 '계급'의 현실에서 나온다"고 쓰고 있으며 개인들도 주변적 그룹들도, 또한 일시적 자율 지대도 통도 이 책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 하킴 베이는 "일시적 자율 지대의 너머에, 반란의 너머에, 필연적인 혁명이 있다"고 쓰고 있다 (재인용. Armitage 123).8

계급투쟁과 혁명이라는 지향이 역사적으로 가져 온 의미를, 그리고 노 조를 중심으로 한 그 투쟁이 현실의 운동에서 차지해 온 배분을 생각할 때 북친과 아미티지의 지적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최근의 가장 큰 운동 중 하나였던 월가 점령 운동 역시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계급의 완화된 버 전이라 할 수 있는, 경제적 지위에 근거한 '99%'를 주체로 삼았던 점을 생 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에 더해 하킴 베이 스스로가 계급과 혁명을 인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한다면, 일시적 자율 지대라는 방침 을 이대로 폐기하면 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킴 베이는 재판 서문 에서 "'사회라는 것은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지금, TAZ는 그 언제보다도 시의적절해 보인다"고, "때로는 TAZ가 외부, 혹은 총체성에 대한 진정한 [End Page 115] 저항 공간을 창조할 최후이자 유일한 수단으로 보인다"고 썼다 (T.A.Z.2nd x–xi).9 이로써 계급투쟁의 현실성과 하킴 베이 자신의 변화를 근거로 일 시적 자율 지대를 그저 폐기할 수 없다면, '개인 혹은 주변적 그룹'의 '혁명 을 포기한' 이러한 구상이 어떤 배경에서 요구되었는가를 다시 보아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계급, 정확히는 혁명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은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않음'이라는 속성을 통해 정의되며 이들의 투쟁 은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통해 마침내 계급 없는 사회를 이룩하는 데로 이 어진다. 다른 종류의 사회적 구분들에도 불구하고 계급이 혁명의 중심적 인 ― 사실상 유일한 ― 주체가 된 것은 마르크스가 다른 모든 동물과 구분 되는 인간의 특징적 활동을 노동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계 급적 관계가 '권력' 혹은 체제가 부여하는 유일한 관계, 혹은 적어도 최우 선적인 관계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포스트아나키즘"을 언급하며 하킴 베이는 기존의 아나키즘이 배제해 온 다양한 주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날의 아나키스트 "운동"은 사실상 흑인, 히스패닉, 미 원주인, 혹은 어린이들 … 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 이론상으로는 그런 진정으로 억압 받는 그룹들이야말로 모든 반권위주의적 저항으로써 가장 많은 것을 얻 을 텐데도 말이다. 진정으로 박탈당한 이들이 실제의 필요와 욕망을 충 족시킬 수 있을 (혹은 적어도 충족시키기 위해 현실적으로 투쟁할 수 있 을)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아나키'즘'이 제공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그렇 [End Page 116] 다고 한다면, 이 실패가 빈곤하고 주변적인 이들에 대한 아나키즘의 호 소력 부족만이 아니라 또한 그 계층 내부로부터의 불만과 이탈을 설명할 것이다. 데모나 피케팅을 하고 19세기 고전을 재발간한다고 생기 넘치고 대담한 자기해방의 모의가 되지는 않는다. 운동이 사라지지 않고 성장하 려면, 쓸데없는 것들은 대거 버려지고 위험한 아이디어들이 포용되어야 할 것이다.

(T.A.Z. 95–96)

설사 북친이나 아미티지의 주장대로 일시적 자율 지대라는 기획이 정치적 진보에 반대되거나 무용한 것이라 하더라도 하킴 베이가 제기한 이런 문 제가 해소되지는 않는다. 하킴 베이는 여기서 다양한 주체들이 배제되고 있음을, 또한 그 배제로 인해서 전체 운동의 동력이 약화됨을 함께 문제시 하고 있다. 레오나르드 윌리엄스(Leonard Williams)가 지적하듯 하킴 베 이의 논의가 "계급기반 조직들 스스로가 군산 복합체와 금융자본의 전지 구적 영향력과의 싸움에서도 새로운 사회적 운동들에 의해 드러난 교차되 고 다중적인 지배의 축들과의 싸움에서도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두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면10 일시적 자율 지대 구상이 현실적인 파급 력을 갖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대책이 계급 중심주의로의 회귀가 될 수는 없다(124). 더욱이 특정한 권력 관계만을 기준으로 거대한 주체를 설정할 때, 상대적으로 덜 중시되는 권력 관계 속에서 억압 받는 이들은 이 중적인 배제를 겪는다. 그리고 이러한 배제는 단지 복수의 문제를 병렬적 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예컨대 전통적으로 노동자 계급 은 남성으로 표상되어 왔고 이런 흐름 속에서 여성은 배제되었으며, 하이 디 하르트만(Heidi Hartmann)의 유명한 글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불행한 결혼」("The Unhappy Marriage of Marxism and Feminism")이 [End Page 117] 보여주듯 '마르크스주의'가 '페미니즘'을 인지한 후에도 이러한 문제는 계속 되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결혼'은 영국보통법에 묘사된 남편과 아내의 결혼 같은 것이어 왔다.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은 하나고, 그 하나는 마르크스주의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Hartmann 1). '99%'를 표 방한 월가점령 운동에서도 '51%'를 자처하며 "가부장제를 점령하라"라는 구호를 제시한 이들이 있었던 것은 이러한 비판의 최신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비단 마르크스주의와 '노동 계급'만의 문제가 아니며, 페미니즘 내에서도 같은 방식의 비판이 제기된다. '여성'이라는 거대한 집 단을 단일한 것으로 호명하는 페미니즘에서 예컨대 유색인 여성이 유색인 으로서 겪는 억압은 포착되지 않으며, 체리 모라가(Cherríe Moraga)는 자 신 또한 페미니스트로서 이러한 페미니즘의 '혁명'에 대한 거부를 선언했 다.11 계급의식의 결여가 아니라 오히려 ― 계급이든 성별이든 인종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 특정한 범주를 특권화하고 본질화함으로써 행해지는 다 양한 권력 관계들의 은폐가 진보에 반대되는 것이다.

다소 강하게 말하자면 다양한 개인들을 범주화하고 추상화함으로써 집 단 주체를 호명하는 것은 다양한 실재를 은폐하는 시뮬라시옹의, 스펙터 클의 작동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시적 자율 지대'가 계급을 주체로 호명하지 않는 것은 계급적 현실을 외면해서가 아 니라 '계급적 현실'이라는 말로 추상화된 시뮬라시옹의 영역을 벗어나 '외 부로부터'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순전한 시뮬라시옹으 로서의 권력이라는 규정에 대해서는 앞 절에서 이미 다루었으므로 전쟁을 언급한 북친의 비판에 다시 자세히 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일시성 비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역시 앞에서 보았듯, 일시성은 체 제의 포섭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다. 그러나 일시적이라고 해서 그것을 그 [End Page 118] 저 "지나가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이전에, "지나가는 사건"은 세 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일까? 이 지대가, 이 사건이 일시적인 것은 체제를 이길 만한 힘을 비축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금 곧장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일시적 자율 지대라는 구상에서 일시성보 다 더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즉각성, 다시 말해 '지금 여기' 자율적인 공간 을 창출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기에 노동자 계급이 혁명의 성 공을 위해 부르주아 계급에 협조하는 대신 독자 노선을 택했을 때 일어났 을 법한 일이다. 말하자면, '혁명'을 위해 지금의 자유를 유보하는 것은, 혁 명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사람들 스스로의 요구에 반하는 일이다. 어떤 "운동"이 "모든 반권위주의적 저항으로써 가장 많은 것을 얻을" 그 그룹들 의 필요를 유보한다면, 그 그룹들이 그 운동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는 없 다(T.A.Z. 95). 비록 일시적인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비록 소 규모일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그 어떤 것도 유보하지 않음으로써 일시적 자율 지대는 미래의 자유를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자유를 실현한 다. 그리고 이것은 개개인의 자유를 앗아가는 시뮬라시옹으로서의 권력에 대한, 전체로서의 스펙터클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대적이다. 체제의 작동 이 모든 것을 포섭하고 통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영구적이건 일시적이 건 자율 지대의 생성은 그 자체로 체제의 오작동인 것이다.

Ⅳ. 일시적 자율 지대의 정치적 의의

체제가 (혹은 반체제가) 부과하는 범주에 포섭되지 않는 개인들이, 미래 로 유보하지 않고 지금 바로 얻어내는 자유의 공간으로서의 일시적 자율 지대, 그리고 그 속에서 형성되는 법 바깥의 주체에 대해 지금까지 논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것이 정치적으로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 보다 구 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해적 공동체가 일시적 자율 지대의 원형이라 면, 하킴 베이 당대의 '전형'은 다름 아닌 파티로 제시된다. 질서지워지지 [End Page 119] 않았기에 그 자체로 열려 있는 파티라는 공간에서는, 체제 내에서와는 전 혀 다른 개인들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며 개인들 사이에는 '직접적인' 대화 가 오간다. 이런 의미에서 "현존 사회 질서 내에서 인간 사회의 최고의 형 태는 응접실에서 발견"되며, 이곳에서는 "각자의 개인성이 온전히 허락된 다." 이곳에 "에티켓의 법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에 의해, 각 개 인의 정신에 의해 허락되고 판단된 원칙들의 순전한 제안들일 뿐이다." (T.A.Z . 202).12 이러한 파티를 염두에 두고 하킴 베이는 이렇게 쓴다. "'파 티할 권리를 위해 싸우라'는 것은 급진적 투쟁에 대한 패러디가 아니라, 다 른 인간 존재자들에게 '다가가 닿을' 방식으로 [오직] TV와 전화기를 제공 하는 시대에 적합한, 급진적 투쟁의 새로운 선언이다."(152). 그런데 파티 란 무엇인가? 임금 노동자에게 파티란 내일의 노동을 위한 충전을 거부하 고 노동에 써야 할 에너지를 유희에 쓰는 것이다. 학생에게 파티란 과외 학습을 거부하고 학습에 써야 할 에너지를 유희에 쓰는 것이다. 다시 말해 파티란, 체제가 지정해 준 자리를 벗어남으로써 체제의 지배를 흩뜨리는 행위이다.

이와 유사한 접근을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논의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밤 시간을 활용해 읽고 쓰고 토론하기 시작 한 노동자들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내가 이해하기로 '미학적' 혁명, 노동자들에게 공동체의 상징적 공간 내의 (혹은 외부의) 그들의 자리를, 생산과 재생산의 '사적' 영역에 둔 감각적인 것의 분할의 전복이었습니다. […] 이 노동자들에게 있어 해 방은, 낮을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시간으로, 밤을 그들이 휴식하는 시간으 로 규정한 감각적인 것의 분할을 깨뜨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밤을 그 [End Page 120] 이상의 것으로 만들기로 ― 자는 대신 쓰고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기로 한 결정이 해방의 시작이었습니다.

(Blechman et al. 292–93)13

여기에서 노동자들이 해방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노동자라서 가 아니라 노동자이기를, 낮에 일하고 밤에 자야 하는 존재이기를 거부했 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생겼다가 낮이 되면 사라지는 이 노동자들의 독서 실, 토론장은 지금껏 논한 일시적 자율 지대의 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 다. 그는 이어 "평등은 꿈꾸어지기 전에 실천되어야만 한다. 달성해야 할 유토피아적 목표를 갖는 것과 지금 여기서 당신의 공간, 당신의 시간 […] 그리고 일상생활의 이 모든 측면들을 재구성하려는 새롭고 구체적인 의도 를 갖는 것은 같지 않다"고 말한다(Blechman et al. 294, 필자 강조). 일시 적 자율 지대를 형성한다는 것, 지금 여기서 법 바깥의 주체로 거듭 난다는 것은 단순히 "열반의 평온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혁명'이 라는 추상적인 말 속에서 뭉뚱그려져 사라지는, 혹은 뭉뚱그려지지조차 못하고 사라지는 것들을 지금 실천함으로써 지금 알아내는 것, 나아가야 할 구체적인 길을 그리는 것이다. 일시적 자율 지대는 한순간 형성되었다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다른 때에 재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해방은 목표라기보다는 과정, 미래에 집어넣을 이상이라 기보다는 현재에서의 단절이다."(Blechman et al. 292).

그러나 목표가 아니라 과정만이 제시되는 한, 언제나 의문은 남는다. 밤 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 노동자들은 이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일시적 자율 지대를 형성했다 해산한 이들은 이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다른 곳 에서, 다른 때에 새로운 자율 지대를 만든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체제의 [End Page 121] 균열이 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두 번째의, 세 번째의 자율 지대는 점점 더 큰 것이 되어 마침내 전지구적 자율 지대가 될 수 있는가? 그 전지구적 자율 지대를 피해 또 다음 자율 지대가 형성되어야 하는가? 물론 이러한 질문들은 하킴 베이가 거부하는 혁명의 질문, 랑시에르가 부 정하는 목표의 질문이지만 인간이 존재하고 정치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반복될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전지구적 자율 지대란 달성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밤을 탈환한 노동자들은 그 밤의 토 론을 통해 인종에 따라, 성별에 따라, 나이에 따라, 건강에 따라 자신들에 게 부여되어 있는 자리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흑인, 히스패닉, 미 원주 인, 혹은 어린이들"이 억압에서 벗어나는 자율 지대에서는 아시아인의, 여 성의, 성소수자의, 장애인의 억압이 드러날 것이다. (예컨대 앞에서 언급한 펄 앤드류스의 "디너 파티"에서의 다양한 대화에서 말을 거는 것은 "신사" 이지 "숙녀"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하킴 베이의 사유는 우리에게 작은 변화라도 있는 것이 없 는 것보다는 낫다는 모호한 희망 이상의 것을 주지 않는 것인가? 심지어 자신의 저작 자체가 그렇게 되었듯14 체제는 모든 것을 포섭한다는 그의 진단은 틀리지 않은 듯 보이며, 그렇다면 일시적 자율 지대는 결국 현실 도 피 이상이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여기서 강조되는 것 은 진보하는 역사에 대한 희망에서 대의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진보시키려는 의지를 갖고서 '지금,' '여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임을 명 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시적 자율 지대의 형성은 결코 도피가 아닌 적극적 실천이며, 최악의 경우에조차도 그것은 혁명적 주체를 ― 혁명에 복 [End Page 122] 무하는 주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의 혁명인 주체를 형성하는 실천 이다. 이렇게 형성되는 법 바깥의 주체는 법 앞에, 현 정부의 법과 혁명 정 부의 법 모두 앞에 조아리지 않고 그 법을 비판한다. 사이먼 셀라스는 (하 킴 베이의 철학적 방법론의 한 축을 이루는 들뢰즈-가타리 철학에 대한) 패트리샤 피스터(Patricia Pisters)의 문장을 인용해 이 중간 지대의 의미를 밝힌다. "이론과 철학의 할 수 있는 바는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구 성하는 다양한 정치적 선들의 복잡성을 포착하기 위한 우리 지각과 감각 을 날카롭게 하는 것이 전부이다."(재인용. Sellars 103). 밤을 탈환한 노동 자들이 이튿날 무엇을 할지, 두 번째로 형성된 자율 지대가 어떤 모습일지 는 이론이 말해주지 않는다. 이 중간 지대는 언제나 출발점이며, 이론은 그 출발점의 좌표를, 그나마도 근사치로 알려 줄 수 있을 뿐이다. 사이먼 셀라 스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요청한다. "그것을 창조해낸 정신을 재검토하며, 이제 일시적 자율 지대에 다시 사람을 들이자." 그것을 창조해 낸 정신이 란 다름 아닌, 목적지를 미리 알고자 하는 ― 그래서 오히려 길을 잃고 마 는 ― 두려움에 대한 반성이다. 묘수는 단순하다. "결코 움츠러들지 말" 일 이다(Sellars 103).

Ⅴ. 나가며

지금까지 하킴 베이의 일시적 자율 지대 개념을 개관한 후 그에 대한 비 판을 검토하고 이를 재비판함으로써 이 개념의 정치적 의의를 밝혔다. 이 과정에서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반복적으로 서술하였기에, 이 개념의 의 미와 의의를 다시 요약하는 대신 몇 가지 지점을 덧붙이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기로 한다.

자율 지대가 어떤 모습일지는 이론이 말해주지 않는다고, 결국 그에 대 한 답은 실천이 해 줄 수밖에 없다고 본론을 끝맺었지만 정작 그 어떤 실 례도 언급하지 않은 점에 대한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하킴 베이는 자신의 [End Page 123] 사유가 도그마가 되지 않으면서 해방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기를 원했 으며, 쉽사리 제약되거나 분류되지 않기를 원해 폭넓은 스펙트럼을 오가 며 과장되고 자유로운 문체를 동원했다.15 사유의 핵심 개념을 수사적이고 느슨한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은 다양한 방향으로 분기하는 사유와 실천 및 실험을 가능케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개념을 오독하기 쉬운 상태로 남 겨두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이것의 일시성과 자율성을 상대적으로 유연 한 것으로 제시하는 재판 서문에서의 그의 서술을 토대로 이 개념을 여러 실천들에 자유롭게 적용하는 것은 오히려 그 정치적 의의를 갉아먹는 결 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의 말대로, "어쨌거나 약간의 자율성이라도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체제의 요구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그로부터 '자율성'을 체현하는 것은 가능한 한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디너파티"는 "각 개인의 정신에 의해 허락되고 판단된 원칙들의 순전한 제안들"만을 따른다는 점에서 분명 자율적이다. 그러나 거기서도 "신사가 숙녀에게 말을 건다"는 외부의 규칙이 그대로 적 용되고 있는 한, 그것은 어디까지나 "약간의 자율성"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공간을 "자율 지대"로 칭하며 상찬한다면 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을 내세우며 "주변적 그룹"들을 주변에 남겨두는 것과 똑같은 문제를 방치하 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일시적 자율 지대"라는 명칭은 국가가 인지 하지 못하는 응접실에서의 차별적인 디너파티보다는 국가에 의해 구속되 었음에도 자기 양심에 따라 말하는 한 죄수가 머무는 감옥에 더 어울릴지 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실천들에 일시적 자율 지대라는 이름을 붙임 으로써 그것을 높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의 자율 지대를 자율적 이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낼 새로운 자율 지대를 형성하는 일이다.

일시적 자율 지대(뿐만 아니라 모든 실천 방식)의 의의를 지나치게 강 [End Page 124] 조함으로써 그것을 도그마로 만드는 일 또한 피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아무리 결심해도 밤에 책을 읽고 토론할 수 없을 만큼 고된 노동에 시달리 는 노동자가, 파티를 열 응접실을 갖지도 버려진 땅으로 이동할 수단을 갖 지도 못한 누군가, 어떻게 자율 지대를 형성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물어 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일시적 자율 지대 또한 혁명과 마찬가지로 "원하 기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개개인의 사정을 무시한 채 집 단으로 호명하는 것만큼이나, 체제 속에 묶인 상황을 무시한 채 자율적 개 인으로 호명하는 것 또한 "일상생활"을, '실재'를 앗아가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시적 자율 지대의 구체적 사례들을 제시하고 그로써 이것의 실질적 가능성을 굳이 강조하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16 어쩌면 그 강조 는 애초에 필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하킴 베이의 말대로 일시적 자율 지대가 늘 있어 왔고 지금도 있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포섭하는 체제의 [End Page 125] 힘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포섭되지 않은 영역이 ― 의식적이건 무의식 적이건 ― 포섭되지 않은 공간을 창출하려는 욕망이 있다는 뜻이니 말이 다. 그렇다면 일시적 자율 지대를 대신 지목해 주는 이가 필요하지는 않 을 것이다. [End Page 126]

Jongju Park
Seoul National University
Jongju Park

Jongju PARK is a Ph.D. candidate at the department of Aesthetic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Having interests in sociology of arts, political philosophy, feminism, and Modernism, he is now working on a feminist review of the notion of the sublime for his dissertation. lesbeauxxx@gmail.com

Received: 30 March 2017
Reviewed: 8 June 2017
Accepted: 15 June 2017

Works C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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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Z.: The Temporary Autonomous Zone, Ontological Anarchy, Poetic Terrorism (letter imposed edition). The Anarchist Library, 1985, theanarchistlibrary.org/library/hakim-bey-t-a-z-the-temporary-autonomous-zone-ontological-anarchy-poetic-terrorism.lt.pdf. Accessed 26 June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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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1. 하킴 베이는 피터 램본 윌슨(Peter Lamborn Wilson)의 필명이다. '하킴 베이'이라는 이름 으로 '일시적 자율 지대' 개념을 제안한 책 T.A. Z.: The Temporary Autonomous Zone, Ontological Anarchy, Poetic Terrorism 은 사이먼 셀라스(Simon Sellars)에 따르면 "취한 듯하고 장식적인 서술 문체"(high, ornate narrative style)를 띠고 있는데, 이는 "족 장"(chieftain)에 해당하는 터키어인 '베이'와 이어진다. 한편 '하킴'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해 커 혹은 해킹을 함의한다." 한편 Bey는 족장(혹은 지방장관 등) 이외에도, - 씨, - 군, - 경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 경우 성 뒤에 붙여 쓴다. Cf. Sellars p. 89.

2. 1985년 처음 발행된 T.A. Z.: The Temporary Autonomous Zone, Ontological Anarchy, Poetic Terrorism 은 하킴 베이가 앞서 발표한 글들을 모은 책으로, 카피 레프트 정신에 입 각해 여러 곳에서 그 '해적판'이 발행되었다. 2003년 제 2판(New York: Autonomedia)이 발행되기까지 네덜란드어, 독일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일본어, 슬로베니아어, 터키어 등으로 번역된 바 있으며 초역(抄譯)을 포함하면 더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글 에서는 Hakim Bey. T.A. Z.: The Temporary Autonomous Zone, Ontological Anarchy, Poetic Terrorism (letter imposed edition) (The Anarchist Library, 2009)를 기준으로 인 용하되, 이 본에 포함되지 않은 2판 서문에 한해 Hakim Bey. "Preface to the Second Edition." T.A.Z.: The Temporary Autonomous Zone, Ontological Anarchy, Poetic Terrorism , 2nd edition, Autonomedia, 2003, pp. ix-xii를 인용하기로 한다. 이 책의 인용 은 모두 전자를 T.A.Z. , 후자를 T.A.Z.2nd로 약칭해 '제목 쪽수'의 형식으로 내주로 표시하 며, 같은 책에서 반복적으로 인용한 경우 제목 표기는 생략한다. 특별한 표시가 없는 한 굵 은 글씨로 강조한 것은 원문에서 이탤릭체로 강조된 것이다.

3. 또한 일시적 자율 지대 구상에 대한 다양한 응답은 최근까지도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이 러한 글들의 목록은 같은 글 89–90쪽을 보라.

4. 일시적 자율 지대에 관한 장은 "해적 유토피아"라는 절로 시작하며, 그는 이것에 대한 "내 모든 연구와 사변이 '일시적 자율 지대'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결정화되었다"고 쓰고 있다 (T.A.Z. 142).

5. 하킴 베이는 이 점을 제국의 정복에 비유한다. 그는 1899년을 마지막으로 지구상의 모든 '주인 없는' 땅은 국가들의 소유지가 되었다며 "우리 [세기]는 미지의 땅 없는, 한계(frontier) 없는 최초의 세기"라고 지적한다. 이런 점에서 "지도는 닫혀 있지만 자율 지대는 열려 있다. 은유적으로 그것은 통제의 지도에는 비가시적인 프랙탈한 차원에서 펼쳐진다. 그리고 여기 서 우리는 국가의 측량과 지도제작의 '심리적 제국주의' 과학에 대한 대안적 '과학'으로서 심 리지형학(및 심리지형)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그는 심리지형학의 의미를 분명히 정의하 지는 않지만, 이를 통해 실재를 추상화하지 않는 "1:1 지도"를 그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지도란 "창조적 상상력의, 미학의, 가치의" 지도이다. 추상화의 과정에서 누락된, 자율 지대 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하고 창조할 수 있는 '실재'를 제공하는 지도인 셈이다. 한편 이 추상화는 단지 제국의 지도에서만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부르주아의, 공산주의자 의, 파시스트의 모든 "성공한" 혁명 또한 제국의 지도와 마찬가지로 "닫혀 있다"고 보고 있 다. 따라서 그는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모든 '영구적 해결책'과의 얽힘을 피하며, 일시적인 '권력 동요'(power surges)에 힘을 모은다." (T.A.Z. 149–50; 154).

6. 일시적 자율 지대를 규정하면서 논의하지 않은 하나의 요소를 주석으로나마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바로 인터넷의 역할에 대한 하킴 베이의 강조이다. 그는 "모든 정보와 통신 전송의 총체"로서의 넷(Net)과 그 속에 있는 저항적 공간으로서의 저항-넷(Counter-Net) 혹은 웹(Web) 개념에 책의 한 절을 할애한다. 앞서 언급한 해적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일시 적 자율 지대들은 일종의 (수평적) 관계망을 형성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통신망이 큰 역할 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전망이었다. 그는 "TAZ는 컴퓨터가 있든 없든 발생한 바 있 으며 발생 중이고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TAZ가 그 완전한 잠재력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 발적 연소의 문제가 아니라 '망 속의 섬들'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T.A.Z. 162).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이에 대해 다루지 않은 것은 하킴 베이가 논의를 제시한 것이 컴퓨터 통신이 이제 막 상용화 되던 시기였고, 그 사이의 기술적 변화와 그를 통해 드 러난 인터넷의 긍정적/부정적 측면들은 여기에서 다루기에는 너무도 광대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한 지적은 2003년 하킴 베이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는 자신의 책이 알려지는 데에 통신망이 기여했음을 인정하면서도, 통신 기술에 대한 자신의 과거 견 해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쓸모없는 부분은 인터넷에 관한 절이라 고 생각한다. 나는 넷을 TAZ의 부속물, TAZ에 봉사하는 기술, 그 발흥을 가능케 할 수단으 로 묘사했다. […] [그러나] '웹'은 넷의 상업적/감시 기능을 가리키는 공식 용어가 되었으며 1995년께에는 (그런 것이 정말로 있었다면) 넷의 아나키적 잠재력을 광고와 닷컴 사기의 더미 밑에다 묻어버렸다. 좌파에게 남은 것은 정치적 행동으로 비치는 몇 천 건의 '접속'과 '가상 공동체'가 인간 현전을 대신하는 유령 세계 속에 깃든 듯 보인다." (T.A.Z.2nd xi). (뒤 에서 보게 될 존 아미티지의 비판 역시 웹 개념 비판을 한 축으로 삼고 있으나 같은 이유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7. 이 글의 주석 2번을 참조하라.

8. 앞뒤에서 언급된 『밀레니엄』의 문장은 모두 재인용한 것으로, 원래의 출전은 Hakim Bey. Millennium . Autonomedia & Garden of Delight, 1996, pp. 47, 30이다.

9. 이 말 앞에서 그는 일시적 자율 지대가 90년대나 2000년대에 비해 낭만적이고 에로틱했던 시대인 80년대의 것으로 여겨진다고, 또한 그것은 세계가 자본주의와 스탈린주의로 양분되 어 있던 시기 제 3의 길을 찾기 위한 기획이었다고 쓰고 있다(T.A.Z.2nd x). 그럼에도 그는 미래의 운동 중 일부는 여전히 일시적 자율 지대일 것이라는 전망을, 그리고 영구적 자율 지대에 대한 희망을 내어 놓는다(xi).

10. 이 문장은 베이의 작업이 "마르크스의 유산을 잃어버린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 혹은 상 황주의" 에 지나지 않는다는 아미티지의 비판에 대한 반론으로 제시된 것이다(Armitage 121).

11. Cf. Moraga, et al. p. xiii. 그는 이렇게 썼다. "됐어, 언니들. 내가 매사추세츠 워터타운의 백인 거주지를 떠나 T라인을 타고 록스베리로 돌아가면 아무 의미도 없는 혁명 문건이나 쓰고 있을 수는 없지."

12. 이것은 「부록 C: 추가적 인용문」에 "디너파티"라는 제목으로 실린, 펄 앤드류스(S. Pearl Andrews)의 『사회 과학』(The Science of Society )에서 가져온 글의 일부이다.

13. 이것은 "당신의 이론적 틀에서 해방이란 어떤 것입니까? 이 아나키적인 불화의 정치에서 해방적인 가능성과 목적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이자 자신의 저서 『프롤레타리아의 밤: 노동자의 꿈의 기록』(La Nuit des prole ´taires: Archives du reˆve ouvrier , 1981)을 언급하는 대목이다.

14. 하킴 베이가 일시적 자율 지대의 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으로 본 통신망은 "상업적/감시적 기능"을 띠도록 포섭되었으며 따라서 하킴 베이 또한 '체제에 무해한' 인물이 되어 버렸다. 그는 "나는 넷의 이러한 [일시적 자율 지대에 봉사하는] 기능을 위해 '웹' 개념을 제안했다. 우스운 일이다. 『타임』지는 나를 사이버구루로 여겼으며 TAZ는 사이버공간에 존재한다 고 '설명'했다"고 자조한다 (T.A.Z.2nd xi).

15. Bey. T.A.Z.2nd, p. 165; Williams. p. 128, 131 참조.

16. 이러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심사자의 의견에 따라, 그리고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각주에나 마 몇 가지 사례를 덧붙이기로 한다. 1980년 5월 광주의 공동체에서부터 2008년 및 2016–2017년의 촛불집회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거대 사건에서만도 일시적 자율 지대의 몇 가지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사례들은 한편으로 '정부와 대적'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런 점에서 혹자는 오히려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이 벌어졌던 광장들을 일시 적 자율 지대의 현현으로 꼽기도 한다) 이를 자율적 질서의 구축, 생산자 -소비자 구도의 탈피 등의 측면에서 읽는다면 그 자율성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존 의 교육 체제와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대안 학교의 교실, 기성 예술계와의 거리를 유지 하는 대안 미술 공간, 일시적인 해방의 공간을 만드는 프라이드 퍼레이드 등 일상적인 공 간에서 또한 그러한 공간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본문에서 지적한 바대로 이들은 동시에 비자율적이기도하다. 5월 광주의 공동 체에서는 성별 간의 분업이 있었고 촛불집회의 광장에서는 '촛불 소녀'와 '촛불 시민'의 구 분이 있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권력차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우리 의 ― 적어도 이론가의 할 일은 기존의 사례들을 일시적 자율 지대로 상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대들의 비자율성을 지적하는 것, 이로써 보다 더 자율적인 지대의 성립을 추동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저 일시적 자율 지대들을 있는 그대로 영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 터 분기하는 새로운 자율 지대를 만드는 것이 하킴 베이의 구상에 보다 적절히 화답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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