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미술관의 초기 백남준 예술 수용의 맥락과 의미:미술관 제도의 관점에서
This study explores the initial reception process of Nam June Paik in French public art museums during the 1970s. Paik's video art was first introduced to French art museums in the mid-70s in a series of historical video art exhibitions held at the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Art Vidéo, Confrontation 74, ARC2; Rétrospective de Nam June Paik, 1978–1979) and at the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 MNAM/CCI ( Jardin-Vidéos, 1978). The paper analyzes the historical contexts, characteristics, and socio-cultural meaning of these early video art exhibitions in relation to the French museum and artistic landscape of the 1970s. In particular, the study examines the favorable cultural and institutional context that fostered the historical reception of Paik's video art in France: the inauguration of the Centre Pompidou (1977), a new type of museum that reserved specific space for new media and contemporary art, offering a desperately awaited new dimension to late modern and contemporary art. The paper also discusses the top-down intraduction process of Paik's early video art in France as well as its significant influence in the development of early French video art history, specifically in relation to the environment of post-68 local artistic scene. In so doing, the study aims to deconstruct the somewhat monolithic and mythical existing historical discourses concerning the artist, suggesting the need for further studies of his work in relation to the cultural, social, political, and historical contexts of its emergence and institutionalization.
Nam June Paik, museum institutional approach, Paris, Centre Pompidou, video art, exhibition
Ⅰ. 들어가며
서양 근대 국가의 태동과 함께 등장한 미술관1은 전통적으로 시간과 공 간을 초월한 보편적이고 영원한 미와 가치를 대표하는 예술 작품들을 선 택하여 보관하고 전시함으로써 대중들의 미술 교육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존재하여 왔다. 또한 미술관은 당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역사적•미학적 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선별하여 보여주고 보존하기 때문에 후대의 미술사 쓰기에 있어서도 하나의 이정표로써 기능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 예술인 지에 대한 정의를 시대적 상황과 문맥에 따라 결정하는 중요한 예술 제도 [End Page 65] 로 존재하기도 한다. 때문에 프랑스의 예술 사회학자 레이몽드 물랭 (Raymonde Moulin)은 오늘날 우리가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예술작품이 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문적으로 분화된 다양한 조직 체계들, 즉 예술 제도2들에 의해 예술로 정의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특히 그녀는 미술관이야 말로―화랑을 포함한 다른 전시공간들과 함께― 개인전 및 단체전등을 지속적으로 조직하고 시각적으로 풍요롭고 멋진 도 록들을 발간함으로써, 새로운 작가들을 발견 및 홍보하고 예술 작품의 가 치를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곳이라고 했다(Moulin 64). 결국 이 같은 관점 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미술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더이상 고독한 천재 적 작가 개인의 산물이 아니라, 미술관뿐만 아니라 예술 교육과 비평 그리 고 미술 시장과 같은 미술을 둘러싼 다양한 미술 환경 및 제도들에 의해 규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성완경 385).
1970년대 말부터 서양의 미술관 연구는 미술관을 보다 폭넓은 의미의 문화 현상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고, 또 그것이 대중의 정서 교화, 문화 소 양 및 취향 개발 등과 관련된 기능을 담당하며, 궁극적으로는 정체성 형성 에 기여하는 문화•사회적 제도로서 존재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 작한다. 특히 후기 구조조의의 사상적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 같은 접근법 은 한 사회에서 제도로서 미술관이 존재하는 방식이나 모습은 내재적이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미술관이 속한 사회•문화•예술•정치 그리고 경제 상 황이나 문맥들과의 동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시대와 함께 변화하며 '구축'되는 것이라고 본다. 이는 1980년대 말부터 포스트 식민주의(post-colonial), 서발턴(subaltern) 그리고 젠더(gender) 스터디 등의 영향을 받 [End Page 66] 아 대중매체 및 문화현상 텍스트 속의 재현과 정체성 문제를 탐구하는 신 문화연구의 성장, 그리고 다양한 분과 학문들의 탈경계 현상으로 규정되 는 인문학연구의 탈근대 혹은 포스트모던이라는 거대한 움직임에 탄력을 받아 생겨난 '신박물관학'(new museology)이나 '비판적 박물관학'(critical museology)이라는 새로운 연구경향을 만들기도 하였다.3 전통적 박물관 (미술관)학이 단순히 무엇을 어떻게 전시할지와 같은 방법론적 연구에 치 중했다면, 새로운 박물관학은 박물관(미술관)이 제도로서 담당하는 사회 적 기능, 목적과 역할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박물관의 활동이 관람객들 의 행동, 사고, 관계에까지 미치는 사회적 영향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를 지향한다(Vergo 2–3).
그 동안 제도적 관점에서 미술관을 분석한 다양한 연구물들을 살펴보면 특히 기호학이나 텍스트 이론의 일부 방법론적 영향을 받아 미술관이 지 닌 상징적 지위, 힘과 권력의 문제에 주목한 연구들이 눈에 띄는 것을 알 수 있다. 박물관(미술관)의 주된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는 소장품 연구 [End Page 67] (collection studies) 분야를 개척한 영국 레스터 대학(University of Leicester)의 수잔 피어스(Susan M. Pearce)는 한 오브제가 박물관(미술 관) 공간으로 들어오는 순간 본래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하고, 기능적인 의미에 더해, 외부에서부터 오는 또 다른 상징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그것이 박물관(미술관) 안에서 다른 소장품들과 일종의 의미의 망을 형성하고, 하나의 완전체 및 시리즈로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Pearce 19–29). 또한 피어스는 오브제의 의미는 박물관(미술관)의 의도 에 따른 전시 상황 및 기술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할 수 있는데, 그것 은 역사적 기억과 문화적 재현을 담당하는 공적 제도로서 박물관(미술관) 이 가진 상징적 힘과 권위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같은 맥락에 서 박물관(미술관) 소장품은 그것이 토대하는 특정한 문화적 '맥락' 안에서 만이 그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프랑스의 박물관(미술관)학자 장 다발롱(Jean Davallon)은 1992년 출 판된 「박물관(미술관)은 과연 미디어인가?」("Le musée est-il vraiment un média?")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통해 프랑스 대혁명 이후 대중들의 예 술 교육을 담당하며 새롭게 탄생한 국가의 시민의식 및 국가 정체성 확립 을 목적으로 기능해온 서양 박물관(미술관) 제도의 사회적•상징적 역할에 주목한다. 그는 박물관(미술관)이란 수집•보존•전시 등의 주요 활동과 기 능들을 통하여 예술 작품의 미학적•역사적 가치와 권위를 부여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시 기법, 즉 뮤제오그라피(la muséographie)4를 통 해 지식을 창출하고, 작품과 관람객 사이의 사회적 매개를 도모하는 '사 [End Page 68] 회-상징적인 장치'(le dispositif socio-symbolique)이자 미디어5라고 규 정한다(Davallon). 비슷한 관점에서 영국의 매체 사회학자 로져 실버스톤 (Roger Silverstone) 역시 제도로서 박물관(미술관)의 지위와 그것이 가지 는 초월적 힘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특히 그는 박물관(미술관)이란 근본 적으로 이야기하는 수사적 주체이며, 또 '전시'라는 특별한 매체적 환경을 공적 공간(public space)에 조성함으로써 관객이 특정한 방식으로 사고하 고 사물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선별된 정보를 제공하고, 또 그들을 매혹하고 사고하게 하는 일종의 '담화 혹은 추론 공간'(discursive space)이라고 본 다(Silverstone 175). 그리고 박물관(미술관)이 보여주는 작품과 관점, 그 리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지식, 정보 및 이야기에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주 목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 제도로서 지니는 상징적 권위 때문이라고 설 명한다.
사실 이 같은 접근법들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미술관이 관객에게 보여줄 작품의 선택과, 또 그것을 공간에서 보여줄 방법을 선택함에 있어서 필연 적으로 전시 주체의 의도가 개입되고, 또 그 의도는 주체가 속한 다양한 맥 락들과(contexts) 상황들(situations)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가정한다. 이는 미술관 전시라는 것이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 [End Page 69] 는 것"이기 때문에(윤난지 7–8), 동시에 전시 자체를 어떤 의미를 생성하 고 전달하는 '매개체' 및 '텍스트'로 보게 한다. 따라서 전시 주체, 즉 미술 관이 재현하고자 하는 의미들을 연구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 및 해 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특히 이 같은 접근법은 미술관의 이상적 모델을 '화이트 큐브'(white cube)로 상정하고, 미술관을 실제적인 삶과 세 속적인 세계에서 초월한, 그리고 보편적이고 영속적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작품들을 전시하고 보존하는, '순수'의 진공 상태를 연출하는 중성적 성격 의 공간으로 보는 모더니즘적 미술관 이해와 상충하고, 오히려 중세의 미 술처럼 미술관 역시 종교, 경제, 정치, 사회 변화 등 세속의 세계를 여실히 반영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증명한다(O'doherty 13–34).
이 같은 반영론적 미술관 접근은 1980년대부터 서양미술사 내에서 시 도된 새로운 학제적 접근의 한 예인 미술관 제도비판 연구들과도 궤를 같 이한다. 미술사학자 캐롤 던컨(Carol Duncan)은 미술관은 고대 신전의 양 식과 형태를 빌린 건축물 안에서, 미리 정해놓은 동선과 이야기에 따라 관 객들을 움직이게 하고, 그들의 행동 및 사고를 디자인 하는 곳이라고 본다. 따라서 미술관은 일종의 건축화된 시각적•공간적 경험을 장려하고, 또 이 를 통해 계몽의 과정을 거치게 된 관람객이 서구 문명 세계 시민의 일원으 로 거듭나는 신성한 '제식 혹은 의례'(ritual)의 공간이라고 주장한다 (Duncan 88–103).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권력 이론에 영향을 받 은 예술사회학자 토니 베넷(Tony Bennett) 역시 미술관은 ― 미술사와 함 께 ― 감옥, 학교, 병원과 같이 무지몽매한 대중의 정서 순화 그리고 문화 의식 함양 및 고취를 위해 존재하며, 또 그들을 통제하기 쉽도록 부르주 아 지배층에 의해 고안된 근대적 '규율, 훈련'의 공간이라고 본다(Bennett 73–102). 결국 이들 모두 미술관과 같은 한 사회의 문화 생산물(컨텐츠) 은 그것이 속한 문화 사회적 맥락의 일부라고 이해하고, 또 그 속에서 작 동하는 세속의 힘과 권력의 패러다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미술관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립적인 곳이라는 인식에도 근본적 [End Page 70] 인 비판과 의문을 제기한다(윤난지 7–8).
본 논문에서는 이처럼 그동안 미술관 연구 분야에서 행해진 다양한 연 구 성과와 관점을 종합하여 미술관이란 한 사회가 특별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작품들을 선별하여, '보여주기'라는 특별한 방식을 통해 적극적으로 의미를 생성하고 전달하는 공간이며, 또 그것이 토대한 시대 적 상황과 문맥에 따라,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특정한 관점과 취향을 구 축하면서, 작가와 작품의 가치와 권위를 승인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제도 라고 이해하고, 1970년대 백남준 예술이 프랑스 미술관에서 수용되는 배 경, 과정 및 그 역사적 의미를 분석하고자 한다. 백남준은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열린 생애 첫 전시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통해 서양 미술사 에서 전자 영상 예술의 본격적 시작을 알린 후, 전 세계의 수많은 미술관들 을 통해 그의 작품들을 선보이며 명실상부한 최고의 비디오 예술가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미술관은 백남준 예술의 미학적• 역사적 가치를 승인함과 동시에 그에게 작가로서의 사회적 명성과 권위를 부여하고, 또 그의 유토피아적 예술관을 더욱 더 많은 이들과 소통 가능케 했던 중요한 예술제도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 논문은 1970년대에 프랑스 파리의 국공립 미술관에서 백남준 전시가 처음으로 열리게 된 맥락과 의도를 살펴봄으로써, 당시 프랑스의 백남준 예술 수용 과정과, 또 이를 가능케 한 프랑스 미술관 제도가 동시대 사회, 문화적 상황들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물론 그 동안 백남준 예술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분야에서 수없이 많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의 초기 비디오 예술을 동시대 미술과 새로운 매체 예술로 그 관심 영역을 확장하는 1970년대 서양 미술관 문화 및 제도를 둘 러싼 역사적 조건이나 맥락과 관련하여 살펴 본 연구는 드물었다.6 특히 [End Page 71] 유럽 국가들 중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근대적 미술관 전통을 지닌 프랑스의 미술관 제도와 문화적 환경 속에서 백남준 예술이 왜, 어떻 게, 무엇 때문에 처음으로 프랑스 미술관에서 소개되었는지에 대한 연구 는 존재하지 않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먼저 1970년대 제작된 백 남준 작품의 개념이나 양식적 변화 그리고 당시 프랑스 예술계의 상황과 문맥을 살펴보고, 그에 비추어 당시 파리 미술관에서 개최된 백남준 전시 들의 내용, 도록 및 현지 비평문 검토를 통하여 전시의 맥락 및 목적을 분 석할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당시 프랑스 예술계와 미술관 문화 및 제도적 환경에서 초기 백남준 예술이 프랑스 미술관에 진입하는 과정과 그 의미를 논하고자 한다.
Ⅱ. 1970년대 백남준 예술과 프랑스 미술 상황
백남준의 비디오 예술의 기원과 발전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 다 그가 클래식 작곡과 피아노에 조예가 깊었던 '음악인' 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50년대 백남준은 도쿄 대학교 미학과에서 아르놀 트 쉰베르크(Arnold Schoenberg) 연구 논문으로 학업을 마친 후, 독일로 건너와 뮌헨, 프라이부르크 등의 음악예술대학에 등록하고 쉰베르크나 카 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의 전위 음악에 영향을 받아 음악가로서의 그의 예술적 여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1950년대 말 그 는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 하기강좌' 에서 존 케이지( John Cage)와 조 [End Page 72] 우한 뒤, 독일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게 되었고, 더불 어 음악의 영역 확장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다. 특히 그는 1960년 초부터 요셉 보이스( Joseph Beuys),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등과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 국제전위운동인 플럭서스(Fluxus) 활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라틴어로 '흐름,' '움직임'을 의미하는 플럭서스(Fluxus)는 서구 근 대의 전통과 제도, 그리고 이성과 합리성에 근거해 만들어진 현대적 삶의 조건과, 체계, 신화들을 깨고, 기존의 엘리트, 오브제 중심의 물질화, 세속 화에 경도된 부르주아적 고급 예술 문화와 제도에 저항하는 것을 주된 목 적으로 하였다. 백남준 스스로도 어느 인터뷰에서 강조하였듯이, 그에게 플럭서스는 예술운동이나 개념이 아니라 "함께 살고, 함께 죽는" 일종의 삶의 철학이고 태도(un mode de vie) 그리고 "정신의 상태"(un état d'esprit) 였다.7 플럭서스는 스스로에 대한 그 어떤 정의를 내리기를 거부 했고, 또 정해진 규범이나 예술 사조 안에 갇히기를 부정했다. 더불어 각기 다른 예술 영역과 장르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뿐만 아니라, 삶과 예술, 신화적 작가 개인과 관객 사이의 모든 경계를 허물고 자유롭고 실험적 예 술 형식을 만들어 나가고자 했다. 또한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열린 개념의 예술을 지향하였기에 회화, 조각, 음악, 문학, 무용, 연극, 건축, 퍼포먼스, 이벤트, 영상 등 다양한 예술 형식과 매체들을 수용하였고, 국제적 소통과 [End Page 73] 교류를 지향하면서, 전통적 예술에 대한 교조적 관념이나 일방적 이해를 파괴하고자 하였다.
1960년대 초반부터 백남준은 이 같은 플럭서스적 사유의 연장에서 다 양한 '음악 퍼포먼스'를 시도한다. 피아노를 부수고, 존 케이지의 머리에 샴푸를 부으며 넥타이를 자른다든지,8 관객들 앞에서 바이올린을 사정없 이 부수거나,9 마치 애완동물처럼 바이올린에 줄을 매달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등 도발적이고 때로는 난폭한 퍼포먼스들을 통해 그는 서양 악기 의 전통적 쓰임과 용도, 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것들을 전복한다. 그리고 성부의 독립, 엄격한 법칙, 대위법 등을 중요시하는 근엄한 클래식 음악에 반하여, 즉흥적이고, 일회적인, 그리고 우연의 요소들을 창작 행위에 끌어 들인다. 이와 동시에 그는 당시 막 보편화되기 시작한 텔레비젼 수상기를 부수거나, 바닥에 엎어놓거나, 아니면 진공관 시그널 조작에 관객들이 참 여하여 텔레비젼 화면 속 이미지를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 된 텔레비전' 작업을 시도하며, 이후 본격적 비디오 예술가의 길을 가기 위 한 개념적, 실천적 기반을 마련한다.
1960년대 중반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백남준은 누구나 즉흥적으로 이 미지를 '연주'하며 전자 영상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마음껏 제작, 변형, 조작 할 수 있는 백-아베 비디오 영상합성기(신시사이저)를 개발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레지던스 작가로 있던 보 스턴의 WGBH 방송국의 지원을 받아 「Video Commune: Beatles from Beginning to End–An Experiment for Television」 (1970)나 「Global Groove」 (1973)와 같은 '비자연적•전자적 현란함'으로 가득 찬 비디오 영 상 제작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게 된다(김홍희 68). 당시 제작된 백남준의 비디오는 펩시 콜라 광고나, 닉슨 대통령의 얼굴, 앨런 긴즈버그(Allen [End Page 74] Ginsberg)와 여자 무용수들이 춤을 추는 영상과 존 케이지와 텔레비젼 아 나운서의 육성이 혼란하게 중첩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아무런 개연 성 없이 빠른 템포의 음악 리듬에 따라 반복적으로 나열되고 움직일 뿐만 아니라, 인물이나 장면들이 신시사이저에 의해 합성되고, 뒤틀리고 변형되 어서 마치 중력을 무시한 채 공중을 떠다니는 느낌을 준다. 이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미지를 통해 백남준은 텔레비전 및 매스 미 디어, 정보 통신 기술의 발전이 현대인의 삶에 끼치는 영향력에 대해 은유 적으로 질문할 뿐 아니라, 마치 텔레비전 화면이 캔버스인 것처럼, 누구나 자유롭게 기계를 조작하여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공적 색상과 이미지 들을 마음껏 합성, 변형하고 복사할 수 있는 기술적, 형식적 가능성을 마련 한다. 더 나아가 전통 예술의 이분법적 구분, 즉 관객/작가, 현실/재현, 원 본/복제품, 미술/음악, 그리고 시각/청각 등의 경계를 깨고, 마치 재즈 음 악을 연주하듯이 즉흥성, 우연성, 즉각성에 기댄 또 다른 예술 창작 형식을 실험한다.
특히 1970년대는 백남준이 비디오 테이프 제작과 동시에 비디오 조각 과 설치 작업에 박차를 가하며, 전위 음악가에서 본격적인 비디오 예술가 로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시기이다. 폐쇄 회로를 사용하여 수상기 앞에 앉 아 명상하는 부처 동상을 실시간으로 촬영해서 보여주는 74년 작품 「TV Buddha」나, 의자 밑에 부착된 수상기가 카메라 앵글을 따라 의자 밑을 보 여주거나 의미 없는 외부 풍경을 계속해서 중계하는 「TV Chair」 (1968/1976)와 같은 작품들은 백남준이 비디오라는 매체만이 지닌 시간성, 즉각 성 그리고 자기성찰적인 성격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을 잘 보여 주고, 감시 기능을 수반한 폐쇄 회로 카메라의 특성을 사용하여 미술관 공간에서 예 기치 못한 상황을 만든다. 또한 24개의 텔레비전 모니터의 주사선을 조작 하여 화면 위에 나타난 전자직선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면서 마치 시계 바 늘처럼 시간을 알리는 「TV Clock」 (1976)과 같은 작품은 '보이지 않는 시 간의 시각화'를 은유적으로 시도한다. 이처럼 70년대 중반부터 제작된 백 [End Page 75] 남준의 설치작들은 비디오 영상과 3차원 공간에서 조각적으로 구성된 TV 수상기들의 만남을 통해 일상의 오브제/조각, 작가/작품/관객, 예술/기계, 정적이고 동적이 것 등의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고, 동시에 부처나 명상으 로 대변되는 그의 동양적 사유방식과 테크놀로지로 대변되는 서양의 사유 방식을 효과적으로 작품에 융합하여, 예술 작품에 관한 전통적 기준 및 인 식의 총체적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결국 1970년대는 그의 플럭서스적 정 신이 가장 정점에 이른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와 동시에 1970년대 중반부터 서양 미술관들은 당시 백 남준 예술의 미학적 가치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그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역사화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많은 미디어 작가들이 록펠 러 재단(The Rockefeller Foundation)이나 뉴욕예술위원회(New York State Council on the Arts)와 같은 대규모 자본으로 무장한 상업 혹은 공 공 메세나의 지원을 받아 TV, 비디오, 라디오, 영화 분야에서 다양한 실험 적 미디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1974년 뉴욕시에 위치한 에버슨 미술관(Everson Museum of Art)은 <Nam June Paik: Videa 'n' videology 1959–1973>(백남준: 비데아와 비디올로지)라는 전시회를 개최하고 1959 년부터 1973년까지의 그의 예술 세계를 집중적으로 소개하였다.10 사실 이 같은 상업적 혹은 공공적 성격을 띈 문화예술 후원기관들이나 미술관 들에 의한 적극적 경제•제도적 지원은 1960–1970년대 미국의 초기 비디 오 예술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Sturken 135–36).
한편, 기술매체 문화와 발전에 대한 사유의 전통이 강한 독일에서는 칼 스루에, 프랑크푸르트, 쾰른 같은 도시들의 예술대학을 중심으로 이미 상 당수의 작가들이 비디오, 전자공학, 텔레비전의 영향 등을 주제로 삼으며 [End Page 76] 미디어 예술 창작활동에 임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쾰른 미술협회 (Kö lnischer Kunstverein)는 1976년 독일 최초로 백남준 회고전 <Nam June Paik: Werke 1946-76/Musik-Fluxus-Video>(백남준: 작품 1946-76/음악, 플럭서스 비디오)를 개최하고, 작가와 샬롯 무어만(Charlotte Moorman)의 도발적이고 유머러스한 음악 퍼포먼스들을 특별히 조명하였 다. 전시는 실험전자음악 작곡가 시절부터 시작된 백남준의 초기 예술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었다.11
프랑스에서는 1970년대 중반부터 주로 파리 시립미술관(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과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Musée national d'art moderne-MNAM/CCI) 을 중심으로 백남준 예술이 서서히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미술계의 전반적 분위기는 미국과 독일 의 상황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먼저 당시 프랑스 예술계의 상황과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68혁명 직후의 프랑스 예술은 유럽 내 다른 어느 곳보다 동시대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는 전통적 타블로(tableau) 회화에 대한 회의로부터 출발해 사회, 문화와의 연결고리로서의 보다 '확장된' 회화를 주장하던 전 후 2세대 작가들에 의해 진행된 쉬포르/쉬르파스(Supports/Surfaces) 움 직임이나, "회화는 우리 ― 뷔렌(Buren), 모세(Mosset), 파르망티에 (Parmantier), 토로니(Toroni) ― 와 함께 시작된다"12고 선언하며 예술 작 업의 영감을 사회와 문화, 특정 장소 및 상황과 같은 맥락(contexte) 안에 서 찾은 B.M.P.T.에 의해 구체화되었다(서영희 30–55). 또한 당시 프랑스 에서는 제라르 프로망제(Gé rard Fromanger)를 필두로 한 신구상주의 [End Page 77] (Nouvelle figuration) 작가들이 보여준 상업이미지에 시사성을 띈 주제를 접목시킨 비판적 저항미술이나, 관객의 참여를 장려하며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회복하고자 했던 놀이미술, 거리미술들이 성행하고 있었다. 그래 서 아주 소수의 작가들만이 비디오를 사용하고 있었고, 그나마 이 시기에 제작된 대부분의 비디오 작품들은 주로 '미적 사회 참여 활동'(l'action esthétique)의 경향을 보이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Fargier 50–55). 예를 들면, 영화감독이었던 장 뤽 고다르( Jean-Luc Godard)는 "이미지와 소리를 실험하고, 텔레비전과 영화 사이의 간극에 대한 탐구 수 단"으로서 영화 대신 비디오를 선택하고, 그르노블에서 은둔하며 「6x2」 (1976)와 같은 정치적인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De Mèredieu 42). 장 폴 파르지에( Jean-Paul Fargier) 역시 복잡한 제작 절차를 거치는 영화와 차 별화된 즉각적 이미지 생성 도구로서의 비디오의 기술적 가능성을 탐구하 며, 주로 사회 참여적인 다큐멘터리 제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회학적 예 술(art sociologique)을 주창하던 프레드 포레스트(Fred Forest)의 경우도 대중과 사회와 괴리된 기존의 예술에 저항하기 위해, 사회과학 이론을 반 영하고 실천에 옮기는 사회 참여 작업의 일환으로 비디오를 사용하고 있 었다.13 소수의 여성 작가였던 닐 얄터(Nil Yalter)는 클로즈업된 자신의 배 위에 여성의 신체 억압을 고발하는 문학 텍스트를 사인펜으로 옮겨 적는 과정과 아랍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여성의 배를 촬영해서 보여주는 1974년 작 「La femme sans te ˆ te」(머리없는 여인)과 같이 주로 페미니즘 적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1970년대 중반의 프랑스 작가들은 비디오를 주로 실험 영화와 텔레비전 사이의 '대안적' 개념의 영상 제작을 위해 사용하거나, 아니면 사 회 참여적 예술을 위한 도구 및 수단의 하나로 비디오를 사용하고 있었다. [End Page 78] 따라서 미국 비디오 예술 초기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던 게릴라 텔레비젼 (guerilla television)과 같이 소비사회를 만드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상업 텔레비전 문화에 반하는 언더그라운드적인 비디오 사용이나, 반문화적 아 방가르드 행동주의 등도 발생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이용우 214). 물론 이는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집중적 국가 재건설, 급속한 산업화 과정을 거 치며 야기된 다양한 사회문제 및 병폐 그리고 가치관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 한 문화적 정치적 격동이었던 68혁명을 거치면서 근본적인 구조의 변화를 겪은 1970년대 프랑스 사회만의 특별한 시대적 상황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 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서방 자유세계의 패권을 잡고 경제•기술•문화적 번영을 누렸던 미국 내 동시대 작가들은 일찍이 비디오의 시간성, 자기성찰 및 사유적 성격이나, 퍼포먼스와 바디아트를 위한 즉각적 기록 매체로서의 가능성을 간파하고, 또 비디오의 시그널 변형 및 3차원 공간에서의 조각화 등의 방법들을 통해 비디오의 다양한 기술적, 구조적, 형식적 가능성을 탐 구하고 있었다. 독일 역시 볼프 보스텔(Wolf Vostell) 등으로 대표되는 1세 대 형식주의 비디오 작가들은 비디오가 회화나 조각과 같은 전통순수미술 과 같은 독립된 예술의 한 분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실험하고 있었으며, 다른 전자기술매체들과 비디오의 융합을 꾀하고 있었다. 이 같은 1970년대 당시의 백남준 예술과 프랑스 현지 미술계의 상황을 염두에 두 고, 1970년대 파리 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전시의 문맥을 살펴보자.
Ⅲ. 1970년대 파리 미술관에서의 열린 백남준 예술 전시와 맥락: 비디오가 미술관 속으로
1. 비디오 예술의 대면, 가능성 탐색: <Art Vidéo, Confrontation 74>(1974)
파리 시립미술관 내에 독자적 현대미술 전문 전시기관으로 설치되었던 [End Page 79] 예술창작지원전시센터(ARC 2)는 1974년 11월 8일부터 12월 8일까지 <Art Vidéo, Confrontation 74>(비디오 예술, 대면 74)전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는 ―제목에서 암시하듯이―비디오라는 전자영상 기술을 '대면'하 면서 새로운 비디오 예술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자리로서, 프랑스 미 술관 역사 상 최초의 대규모 비디오 예술 전시로 기록된다. 70년대 초부터 시립미술관은 근대 미술과 관련된 대규모 상설전 및 기 획전뿐만 아니라 세계 현대 미술의 흐름이나 동향을 소개하고 보여주는 '조망적'(prospective) 성격의 전시, 공연, 문화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해 외 문화예술기관과의 국제 협력 프로그램을 확대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미술관은 1973년 캐나다 현대 미술의 동향을 알리는 <Canada Trajectoire 73>(캐나다 궤적 73)를 통해서 처음으로 북미 지역의 새로운 비디오 예술 경향을 조각, 회화, 사진, 도자기 등과 같은 다른 전통적 매체 작업들과 함께 소개하였다. 그런데 이 전시에서 선보인 비디오 작품들이 당시 파리의 젊은 관객들 사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에 따라 미술관 은 1974년 다시 한 번 더 북미 지역의 비디오 예술 동향을 소개하기로 결 정한다(Pagé). 1974년 당시 발간된 전시도록 서문에서 시립미술관의 학예사 수잔 파 제(Suzanne Pagé)는 전시의 기획의도를 "시간, 공간, 감각 영역을 새롭게 탐험할 수 있게 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예술 체계(système)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비디오의 가능성을 가늠하기 위하여"라고 소개하고 있다. 전시는 프랑스 미국 문화원과 캐나다 문화원으로부터 다량 의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와 백남준을 비롯하여 댄 그래엄(Dan Graham), 피터 캠푸스(Peter Campus), 프랑크 질렛트(Frank Gillette), 빌 비올라 (Bill Viola), 킷 갈로웨이(Kit Galloway), 스타이너와 우디 바술카(Steina and Woody Vasulka) 등 당시 미국 및 캐나다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가 및 그룹들의 작품 백여 점뿐만 아니라, 닐 얄터, 니콜 크로와젯(Nicole Croiset), 롤랑 발라디(Roland Baladi), 크리스티앙 볼탕스키(Christian [End Page 80] Boltanski), 로베르 코엔(Robert Cahen), 지나 페인(Gina Pane) 등 당시 프랑스에서 막 활동을 시작하고 있던 신진 작가들의 작품들도 함께 선보 였다.14 작품들은 형식 및 형태별로 크게 세 곳으로 나뉘어 전시되었는데, 첫 번째 "비디오와 예술가들"(La vidéo et les artistes)이라는 부분에서는 1960–70년대부터 시판된 간편하고 저렴한 휴대용 포터팩 (portapack) 비 디오 카메라로 촬영한 퍼포먼스나 셀프 촬영 영상 기록물을 보여주었고, 두 번째 "비디오 예술"(vidéo art)에서는 비디오영상합성기 뿐만 아니라 기 술적 난이도가 높은 첨단 영상 제작 기술을 사용해 제작한 합성 이미지들 과, 상업 텔레비전 및 매스미디어의 발전과 관련하여 보다 개념적이고 비 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작업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마지막 "환경들"(les environnements)이라는 부분에서는 비디오와 텔레비전 수상기를 사용하 여 미술관 공간에 미적 '환경'을 조성하는 비디오 조각 및 설치작들을 소개 했다. 전시는 파노라마식으로 구성되어 관람객들이 전시실을 자유롭게 이 동하며 감상하며 동시대 비디오 미술의 동향을 한 눈에 읽을 수 있도록 하 였다. 백남준은 이 전시를 통하여 그의 가장 최근작 「TV Buddha」 (1974)와 「Global Groove」 (1973), 「A Tribute to John Cage」 (1973) 등의 비디오 테이프들을 선보였는데, 당시 발간된 전시도록은 다음과 같이 그를 묘사 하고 있다.
한국인 백남준의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백남준은 1960년부터 그의 작업 의 개념과 형식을 텔레비전과 비디오 표현 기술의 예술적 가능성에 기반 을 둔 일종의 종합 예술의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Robot K. 456>과 신 시사이저 등으로 대표되는 그의 초기 작품 형식들부터, 샬롯 무어만과 [End Page 81] 퍼포먼스 <TV bra> (1969) 그리고 그의 최근작 <TV Buddha> (1974)에 이르기까지, 백남준에게 있어서 사이버네틱스(cybernetix)는 인간이 이 룩한 문화와 인간 개인의 창조적 정신이 균형을 이루게 하는 매체인 것 이다.
(Pavie 3)
즉 미술관은 백남준의 예술 여정이 무엇 때문에 다른 작가들과 차이가 있는지, 왜 그의 예술이 주목할 만한지에 대한 답을 '테크놀로지의 인간화' 및 '탈경계적' 성격에서 찾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주최 측이 음악가 로서의 초기 실험 예술 활동에서 본격적인 비디오 예술로 이행하고 있던 당시 백남준 예술의 맥락과 성격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술관은 백남준이 최첨단 전자기술의 예술적 가능성을 탐구하 면서도, 가장 기본적이고 인간적인 감성과 문화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의 성격과 의미를 계속해서 사유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아울러 그 를 비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미술, 조각, 음악, 무용 등 예술 분과적 한계를 초월하는 탈 장르적 새로운 종합예술 현실을 구축하고 있는 주목할 만한 작가로 소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1974년 전시의 역사적 의의는 이제는 과거가 되고 역사가 된 초 기 비디오 작품들을 거의 최초로 프랑스 미술관 공간에서 전시하며 그것 을 역사화하는데 기여하였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전시 구성은 당 시까지만 해도 강력한 근대적 미술관 전통을 바탕으로 주로 회화, 조각, 데 생, 판화 등의 전통적 순수미술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던 프랑스 미술관 의 전시문화와 관행을 고려해보면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19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프랑스에서 백남준 예술을 옹호 하던 제 1세대 프랑스 비디오 작가인 장 폴 파르지에는 당시까지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비디오 예술에 대한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 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그는 대다수의 프랑스 미술인, 비평가 및 전시 기 획자들은 비디오를 상업 텔레비전 방송 제작용 대중매체 기술의 일부 정 [End Page 82] 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성스러운' 미술관 공간에서 전시한다 는 사실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고 기억한다(Fargier 50–55). 물론 이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68혁명의 기운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1970년대 초 프랑스만의 독특한 사회•문화적 배경과, 주로 회화나 조각을 통해 예술의 사회 참여적 가능성을 고민하던 당시 프랑스 화단의 맥락에 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프랑스 작가들은 주로 현실 문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전통적 예술 매체들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나마 산발적으로 제작된 프랑스 비디오 작품들마저도 주로 정 치, 사회, 문화 문제에 몰두한 행동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이 같은 당시 현 지 미술계 상황을 염두에 두고 1974년 전시도록을 살펴보면, 전시 주최 측 조차도 새로운 기술 매체였던 비디오의 예술적 가능성에 대해 다소 염려 스러운 입장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본 전시는 여러모로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작업들은 작품의 기술적 장치들의 무게에 비해서 그 개념적 바탕이 매우 서툴러 지루하고, 가볍고, 빈약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다른 작업들은 마치 하드 웨어만이 그 존재의 목적인 것 같은 풋내기들의 작업물들이나, 장난감들 같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작가들은 지난 세기의 사고 체계나 방 식에 여전히 갇혀 있어 (예술과 텔레비전의) 구체적 사회-경제적 범주들 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회화와 영화 사이에 위치한 반복적이고 장식적 효과, 서정적이고 기하학적 추상, 영화적 기술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조각 된 몽타주들에 기댐으로서) 다소 제한된 미학적 카테고리들 안에서 머무 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Pagé)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은 전시를 통해 기존의 미적 인식에 대한 새 로운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는 야심 찬 기획의도를 밝히고 있는 것이 흥 미롭다. [End Page 83]
중요한 것은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특별한 변화와 발전의 징후들과 그 결과물들을 대면하고, 또 그 것을 우리에게 시간, 공간, 감각 영역을 새롭게 탐험할 수 있는 새로운 시 각을 열어주는, 그리고 전혀 새로운 예술, 정보, 인식 그리고 행동 양식들 의 체계의 탄생을 알리는 메시지를 전하는 매개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 세계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종류의 형태와 색 깔들로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강렬함, 리듬감과 밀도는 가히 획기 적이며, 또 그 조합의 가능성 역시 무한하다.
(Pagé)
즉 1974년 전시는 새로운 방식의 정보 제작, 전달 및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현대적 커뮤니케이션 기술매체로서의 비디오의 전개 및 발 전 과정뿐만 아니라 그것의 예술적 가능성들을 일별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교육적 성격이 강한 것을 알 수 있다.
2. 비디오 예술의 독자적 장르 구축과 확산: <Retrospective de Nam June Paik> (1978)
몇 년 뒤, 1978년 11월 22일부터 이듬해 1979년 1월 8일까지 파리 시립미 술관은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으로 백남준 회고전 <Rétrospective de Nam June Paik>을 개최하고, 작가의 초기 비디오테이프 및 퍼포먼스 들뿐만 아니라, 「TV Clock」 (1963), 「Zen for TV」 (1963), 「Moon is the Oldest TV」 (1965), 「TV Buddha」 (1974), 「TV Candle」 (1975), 「Video Fish」 (1975) 등의 비디오 설치작품들을 선보였다. 특히 프랑스 국립현대미 술관은 이 회고전이 파리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되기 몇 달 전부터 백남준의 < Jandin-vidéos>(TV Garden)을 새로 개관한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의 현대미술 갤러리(les Galeries contemporaines)에서 특별 전시하였다. 이 작품은 전시장 내부를 푸른 식물들과 나무들로 가득 메우 고, 그 속에 「Global Groove」 (1973)와 같은 현란한 비디오 이미지들을 [End Page 84]
<Jandin-videos> 전시포스터
ⓒ Centre Pompidou, 1978; Œuvre reproduite: Nam June Paik ⓒ Nam June Paik Estate Archives du Centre Pompidou.
보여주는 20여개의 텔레비전 수상기를 흩뿌려 놓은 설치작이다. 이를 통 해 작가는 인공 정원으로 변신한 갤러리를 관객들이 자유롭게 거닐게 하 며 그들을 '낯선' 미술관 경험으로 초대하였다.
1978년 전시와 관련된 자료를 미술관 아카이브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 을 보면, 전시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회고전임 에도 불구하고, 백남준의 실험 음악가로서의 면모나 플럭서스적 예술의 성격보다는 1960년대 중반부터 관찰된 비디오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특별 히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퐁피두 센터 칸딘스키 도서관(Bibliothèque Kandisky)에 보관된 백남준 관련 작가 아카이브에는 개막식 초청장이나, 현지 언론 매체에서 전시를 다루는 기사쪽지들, 그리고 전시를 관람한 현 지 평론가들의 글과 같은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특히 1978년 당시 [End Page 85] 퐁피두 센터에서 제작한 < Jardin-videos> 전시 개막식 초청장15은 다음과 같이 그를 소개하고 있다.
과연 비디오가 예술인가? 전자 문화에 알레르기가 있거나, 성스러운 미 술관 공간에 전자 기기가 확산하고 있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들 이라 할지라도 백남준이야 말로 이 같은 질문을 처음으로 심각하게 던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이다. 사실 그 가 이 같은 질문을 한 이유는 바로 그 스스로가 그 어떤 망설임이나 주저 없이 비디오는 예술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비디오로 환 원될 수 있다고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콜라주가 회화를 대체한 것 과 같이, 조만간 모니터가 캔버스를 대체할 것이고, 미래에는 트랜지스 터, 전기, 반도체들이 붓과 바이올린, 그리고 다른 잡다한 예술 재료들을 대신할 것이라고.
이처럼 전시가 열린 1978년경에도 프랑스 일반 대중에게 비디오 예술 이란 여전히 낯선 개념이자 형식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 은 그 당시 프랑스 미술관은 이미 백남준을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로 소개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1990년대 미술사학자 에디트 데커 (Edith Decker)가 비디오 예술의 기원을 둘러싼 기나긴 논쟁을 종식시키 기 훨씬 이전이라는 사실이다(40–59). 즉 미술관은 기존의 예술 재료, 매 체, 개념, 형식과 범주를 무너뜨리고,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꾀하며 본격적 비디오 예술가의 길을 가고 개척하고 있는 당시 백남준 사유와 작품의 움 직임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소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전시는 개막과 동시에 프랑스의 각종 현지 미술 잡지 및 유력 일 [End Page 86] 간지들의 예술문화면의 한 부분을 장식하는데, 특히 1978년 12월 19일 『르 몽드』(Le Monde)지 에 기재된 즈느비에브 브레렛뜨(Geneviève Breerette)의 『빛을 거래하는 자들』(Trafiquants de lumière)16이나 현대 미술월간지인 『아흐프레스』(Artpress)에 실린 다니 블로크17의 글들이 흥 미롭다. 다니 블로크는 모니터 뒤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고 폐쇄회로를 사용한 「TV Buddha」(1974)를 통해 작품과 관객과의 즉각적 피드백의 가 능성에 주목한다. "텔레비전 앞에 앉은 부처가 몇 초 간격으로 계속해서 동기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는 동안, 관객 역시 그것을 바라본다. 이 과정을 통해 이미지의 의미는 계속해서 재생산되는데, 이처럼 백남준은 실제의 시간과 현실, 그리고 전자 이미지로 재생산된 시간과 현실 사이의 끊임없는 간극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Bloch, "pianos de lumières" 8–9). 르 몽드지의 미술비평가 즈느비에브 브레렛뜨는 백남준 의 작품을 통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본다. "백남 준의 예술은 플럭서스의 폭발하는 웃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전자 이미지를 자유롭게 조작하기까지 이른다. 그의 설치작품들은 달빛 속의 목욕, 내면 의 평온함을 불러오고, 고요한 휴식의 상태로까지 우리를 초대한다." (Breerette). 즉, 두 사람 모두 당시로서는 낯선 예술 형식이었던 작가의 비 디오 설치 작품들에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처럼 현지 언론 매체의 뜨거운 관심 속에 서 진행된 1978년 전시의 수용 양상이 불과 4년 전 파리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1974년 당시에는 전시 기획자들조차도 무리수를 두었던 비디오라는 매체의 예술적 가능성 [End Page 87] 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1978년 전시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 다. 하지만 사진예술이 프랑스 미술관 벽에 공식적으로 걸리기까지, 즉 사 진이 독립적 예술의 한 분야로 미술관에서 제도적으로 승인받기까지 걸린 긴 시간과 그동안 벌인 논쟁들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비디오 예술은 상대적 으로 아주 빠른 시간 안에 프랑스 미술관 제도권 속으로 진입하고, 그 예술 성과 독자적 예술로서 위상을 획득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1974 년과 1978년 사이에 프랑스 미술관계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 일까? 대혁명 이후 회화나 조각 등의 순수근대미술을 중심으로 수집 및 전 시 체계를 수립하고 있던 프랑스 미술관이 비디오라는 새로운 기술매체로 예술을 하고 있는, 한국이라는 먼 나라에서 온 백남준이라는 낯선 외국인 작가에게 보여준 이 같은 제도적 환영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Ⅳ. 1970년대 프랑스 미술관 제도의 변화: 동시대 시각예술, 관객과 소통하는 열린 종합문화예술정보매체로
1970년대는 새로운 예술 주체로서 비디오가 일반화되고 국제화되면서, 비디오 예술이 회화나 조각과 같은 독립된 '시각예술'(visual art)의 한 장 르로 제도적 승인을 받는 시기이다. 실제로 1970년대부터 유럽 및 북미지 역의 많은 미술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비디오 작품들을 수집•전시•보존 하기 시작한다. 연도순으로 차례대로 살펴보면, 1971년 뉴욕의 휘트니 미 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과 독일의 뒤셀도르프 쿤스트할 레(Kunsthalle De Düsseldorf)는 최초로 비디오 예술 전시를 기획한다. 비슷한 시기에 신베를린미술협회(Neuer Berliner Kunstverein) 역시 비 디오 포럼(Video-Forum)을 설치하고 독일 지역 최초로 비디오 작품들을 수집하고 상영하기 시작한다. 1972년 독일 카셀 도큐멘타는 국제 예술전 시행사 역사 상 최초로 비디오 작품을 전시하고, 독일 에센 지방의 폴크방 미술관(Museum Folkwang)은 1973년에 비디오테크를 설립한다. 뉴욕현 [End Page 88] 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MoMA)은 1974년 <Open Circuit: The Future of Television>(개방된 회로: 텔레비전의 미래)라는 대규모 비 디오 예술관련 전시 및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비디오 예술을 미술관이 관 심을 가질만한 고급 예술의 영역으로 마침내 영입한다. 마지막으로 프랑 스 국립현대미술관(MNAM/CCI) 역시 1977년 퐁피두센터의 개관과 함께 댄 그래엄의 역사적 작품 「Present Continous Past(s)」(1974)를 미술관 최 초의 비디오 소장품으로 등록하고, 1978년에는 파리 시립미술관과 공동으 로 백남준 회고전을 개최하기에 이른다(Van Assche 15–31). 특히 서양 미술관 발전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1977년 프랑스의 퐁피 두센터의 개관은 새로운 개념의 미술관 탄생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 다.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부터 서양 현대 미술은 퍼포먼스, 미니멀리즘, 개념 미술, 대지미술 등과 같이 장소성이나 관계적 미학을 수용하고, 설치 라는 형식과 다양한 매체들을 사용하면서 미술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고 있었다. 아울러 당시 미술의 경향은 주어진 제도적 조건이나 환경을 작품 의 일부로 수용하며 열린 형식의 종합 예술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 술 작품과 전통적 개념의 미술관 사이의 긴장을 야기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퐁피두센터의 건립 계획은 이 같은 상황에서 전통 미술관이 당면한 문제점들 즉, 고전적 미술관의 획일적 형태와 폐쇄적 성격에 대한 비판과 자각에서 출발하였다. 특히 68혁명 직후 가속화된 프랑스 내의 이 념, 문화적 변화의 기류 속에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보다 새롭고 현대적 인 미술관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프랑스 문화예술계 지식인들 사이에 형 성되었고, 바로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1969년 조르쥬 퐁피두(Georges Pompidou) 대통령이 미술관, 산업 미술관, 도서관, 음악연구센터 등이 한 지붕 아래 모인 복합문화공간의 건립을 정치적으로 결정하면서 퐁피두센 터 건립 계획의 모양새가 갖추어졌다. 더불어 경제 성장을 제일 목표로 삼 았던 우파 대통령이었던 퐁피두가 집권하던 1969년부터 1974년까지 5년 동안 프랑스의 국가 경제는 괄목할만한 성장률을 보였다. 국가 기간산업 [End Page 89] 들(에너지, 교통, 통신, 농업 등)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또 십만이 넘는 일자리를 창출하여서 국민들의 생활수준 역시 질적으로 크게 향상되었다. 이에 따라 퐁피두 정부는 늘어나는 중산층을 위한 새로운 문화 예술 공간 을 만들고자 하였고, 또 전통적 문화대국으로서 프랑스가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걸맞은 새로운 국가 문화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도록 진보적 문화 정책들을 다양하게 수립, 진행하였는데, 바로 그 같은 계획의 일환으로 퐁 피두 센터가 완성되었다. 퐁피두센터의 초대 관장이었던 퐁투스 훌텐(Pontus Hulten)은 1974년 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준비를 위한 미술부장으로 있으면서 기존의 미 술관에서 확장된 개념의 새로운 미술관을 만들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현대적 미술관이라 함은 무엇보다 "가장 동시대적이고 창조적 결과물들을 통해 예술가와 대중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곳"이 되어야 하며, 더 이상 개인적, 사회적, 종교적인 기능을 상실한 작품 들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관람객 스스로가 창작자가 되는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의 요구에도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미술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재인용. Dufrêne 72). 아울러 그는 미술관이 기존에 고수하던 과거의 작품의 수집과 전시, 보관이라는 한정된 역할에서 탈피하여, 현재 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종합문화예술공간 및 정보매체로 변화하기를 지 향하였다(Dufrêne 157). 물론 이는 제 2차 세계 대전 후 뉴욕에게 빼앗겨버 린 국제적 예술의 중심지로서의 파리의 위상을 되찾기 위한 프랑스의 국가 적 노력의 일환이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계획(urbanisme)의 차원에서 현대 사회와 미술의 변화된 환경에 걸맞은 전시, 공연, 영화, 도서관 그리고 예술 연구소의 기능을 총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종합문화예술시설을 파리시에 남기겠다는 퐁피두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를 반영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퐁투스 훌텐은 미술관이 국제적 주요 예술사조들뿐만 아니라 현대 미술의 새로운 표현 방식, 재료 및 형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하여, 미 술관의 관심영역을 비단 순수미술뿐만 아니라 건축, 장식 미술, 영화, 음악, [End Page 90] 사진, 디자인, 비디오 및 행위예술까지 넘나드는 보다 광의의 시각예술 분 야로 넓히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그의 방침은 이후 미술관 소장품 및 전시 정책 수립에 그대로 반영되는데, 앞서 살펴보았던 1978년 백남준 회고전의 개최뿐만 아니라, 1977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부르스 노먼 (Bruce Nauman), 비토 아콘치(Vito Acconci), 피터 캠푸스(Peter Campus) 등 주로 북미지역 작가들의 비디오 작품들을 비롯하여 백남준의 「Vidéo Fish」 (1979) 등 초기 비디오 예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역사적 작품 50여점을 미술관이 소장할 수 있도록 장려하였다. 더불어 그는 뉴욕현대 미술관의 알프레드 바(Alfred Barr)가 구상한 다분과(multidepartmental) 계획에 영향을 받아 소장품별 분과를 조직하였고, 1977년에는 '사진/영화/비디오 부서'를 따로 설립하여 매체예술 작품들의 수집 및 전시를 지원하 였다. 1979년부터는 비디오 및 매체예술 전문 큐레이터 크리스틴 반 아쉬 (Christine Van Assche)와 같은 영역별 전문 큐레이터를 영입하였고, 미술 관이 보다 전문적이고 세분화된 수집 및 전시 관련 정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여 미술관의 연구•조사 기능 역시 강화하였다(Van Assche 15–31).18
이처럼 1977년 퐁피두센터 건립은 국립현대미술센터(Centre national d'art contemporain)는 현존작가들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곳이고, 국립근 대미술관(Musée national d'art moderne)은 작고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 는 곳이라는 고전적 등식에 종지부를 찍고(안소연, "프랑스의" 51–68), 미 술관이 동시대 예술 창작활동 및 이념, 사회적 현실과 조건들 그리고 관객 들과 보다 직접적으로 상호 소통하는 종합문화예술매체로서의 현대적인 임무까지 수행하게 되는 분기점이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1970년대 중반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백남준 전시들은 그동안 순수미술을 중심으로 [End Page 91] 운영되고 있던 근대적 유럽미술관제도가 다원화 및 국제화하는 동시대 미 술 환경에 적응하고, 또 새로운 매체와 형태의 예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 기 위해 그 존재 방식 자체의 근본적 변화를 도모하던 역사적 지점에 위치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Ⅴ. 프랑스와 백남준 예술: 위로부터의 '발견'과 전파
퐁투스 훌텐은 한 때 백남준을 "한국적 전통과 동양적 감성을 서구적 기술과 예술, 문화, 체계와 가장 성공적으로 결합한 한국 작가"로 꼽았고, 또 그를 "한국적 뿌리를 지키면서 국제적으로 통용 가능한 예술 언어" 개 발에 성공한 예술가로 묘사한 적이 있다(Hulten). 이 같은 그의 발언과 입 장에 비춰보면 동양과 서양, 전통과 아방가르드를 아우르는 백남준만의 독특하고 예외적인 전기적 사실들, 그리고 예술/산업, 예술/유흥, 예술/방 송, 아니면 동양/서양, 음악/미술, 기술/철학/예술 등 세상에 존재하는 것 들의 경계를 흐리고자 했던 그의 플럭서스적 미학은, 퐁피두 센터 개관 직 후, 뉴욕의 모마(MoMA) 와 영국의 테이트모던(Tate Modern) 등과 견주 기 위해 현대 미술의 새로운 '신화'를 찾고 있던 프랑스 미술관에게 매우 흥미롭게 비춰졌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1978년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 Jandin-videos> 전시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퐁투스 홀텐 은 기존 권위적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고, 미술관을 "삶과 예술 사이의 경 계가 없는 지속적 연구의 중심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의지 하 에 모습을 갖추어가던 초기 퐁피두 센터가 최초로 비디오 작가, 그것도 외 국인인 백남준에게 현대미술갤러리 공간 전체를 내어준 것이다. 퐁피두 센터의 현대미술갤러리는 현대 예술의 가장 주목할 만한 이슈가 되는 국 제적 동향을 알리는 전시관이었다. 따라서 퐁투스의 이러한 결정은 1970 년대 중반 경부터 프랑스 제도권 내에서 비디오 예술에 대한 관심이 서서 히 싹트고 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End Page 92]
바로 이 같은 당시 프랑스 미술관 문화와 제도만의 특수한 맥락을 고려 해보면서, 1970년대 파리에서 열린 초기 백남준 예술 전시들이 프랑스 현 대 미술 발전에 미친 영향과 파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장 폴 파르지에는 1974년 전시를 참관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는 당시 비디오를 투쟁의 한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비디오로 예술을 한다는 이 들의 허풍(esbroufe)에 대해 경멸 반 의심 반으로 전시를 보러 갔다. 아직 68혁명의 장례가 채 끝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Fargier 50–55). 그럼에 도 불구하고 파르지에는 초기 비디오 예술의 다양한 존재 방식의 가능성 을 보여주었던 이 전시야 말로 1970년대 중후반부터 중장기적으로 자신뿐 만 아니라 상당수의 프랑스 작가들이 비디오라는 매체의 고유한 미적 가 능성의 탐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기억한다. 특히 1977년 사회당 과 코뮤니스트가 하나의 좌파 연합이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면서부터 대다 수의 비디오 사회 활동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였고, 또 그로 인해 많은 작가들이 비디오의 예술적 가능성에 비로소 관심을 가지 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실제로 1978년 백남준 전시가 열린 후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의 프랑스에서는 도미니크 벨루아(Dominique Belloir), 로베르 코엔(Robert Cohen), 미셸 제프레노(Michel Jaffrenenou), 알랑 롱게(Alain Longuet), 파뜨릭 프라도(Patrick Prado), 카트린 이캄(Catherine Ikam), 티에리 쿤 스텔(Thierry Kuntzel) 그리고 모리스 베나윤(Maurice Benayoun) 등으 로 구성된 제 2세대 프랑스 미디어 작가 군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다. 그런데 이들 작업의 공통점은 바로 이전 세대 작가들이 추구하던 다큐 멘터리 형식이나 사회 참여적 퍼포먼스나 행동주의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오히려 백남준이 개척하였던 이미지 변형 및 왜곡, 그리고 비디오 설치와 조각 등의 형식들을 채택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프랑스에서는 미국과 독 일에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늦게 비디오 형식주의가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이용우 214). 프랑스는 세기 초 근대 미술의 중심지로서 비디오 예술 [End Page 93] 발생의 근원적 바탕을 제공하였지만, 문화적으로 풍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는 매우 혼란했던 68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프랑스 미술계 역시 다소 폐쇄적으로 그들만의 독자적 길을 모색할 수 밖에 없었고, 이 같은 상 황에서 70년대 중반부터 오히려 미국에서 이미 성행하고 있던 비디오 예 술이라는 형식을 '역수입'하게 된 것이다(이용우 213–15). 그리고 이 같은 프랑스의 국제적 비디오 예술 역수용 과정과, 그리고 80년대 국내 비디오 예술의 외연과 내연의 확장에는 분명 예술 작품의 사회적•역사적 가치와 기준을 제시하고 규정하는 공적 문화•교육 제도 기관으로서 국공립 미술 관이 담당한 역할을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당시 프랑스 미술관은 국제 사회에서의 문화적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해 세계 현대 예술의 경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 일환으로 현대미술의 국제적 기준이자 동향 중의 하나로 북미 지역의 비디오 예술을 택했고, 또 백남준의 작업들을 소환한 것으로 보인 다. 이 같은 비디오 예술의 제도적 수용 노력은 여전히 독자적 장르로서 비디오 예술의 개념적, 실제적 바탕이 형성되지 않았던 1970년대 프랑스 미술계에서 비디오 예술의 유형별 발전을 자극하였고, 독자적으로 예술로 존재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19 즉, 1970년대 프랑스 미술관은 [End Page 94] 서양과 동양 예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비디오라는 새로운 전자 매 체로 연결하면서 본격적인 비디오 예술가의 길에 접어들고 있던 백남준의 예술의 성격을 포착하고, 그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면서 프랑스에서 백남준 및 비디오 예술의 보이지 않는 '후원자, 장려자'(promoter)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거칠게 도식화해서 이야기한다면, 미국과 독일에서는 전후 유럽의 아방 가르드 전통을 잇는 자유로운 예술 환경과, 기술적 경제적 문화적 풍요로 움을 등에 업고 비디오(및 전자기술매체를 사용한) 예술이 이미 성행하고 있던 상황에서 미술관이 아래로부터(bottom-up) 비디오 예술을 자연스 럽게 흡수하고 반영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프랑스의 경우는 국공립 미술 관이 적극적으로 국제적 예술 동향 및 기준으로서 백남준을 비롯한 북미 권 비디오 작업들을 '역수용'하여 소개하고 교육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백남준 예술 역시 프랑스 미술관에서는 위로부터(top-down) 수용되고 소개됨으로써 현지 비디오 예술 발전에 기여하는 특수성을 보이 는데, 사실 이는 한국의 경우와도 매우 비슷한 양상이다. 이처럼 각국의 사 회•문화적 문맥에 따라 백남준 예술의 수용 양상이나 시기적 차이를 보이 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한편으로 보면 초기 백남준 예술이 국제적으로 전파, 보급, 확산되는 과정 동안 미술관 제도가 담당한 유기적 역할과 관계 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Ⅵ. 맺으며
지금까지 1970년대 파리 국공립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의 맥락과 내용 분석을 통해 백남준 비디오 예술이 프랑스에 처음 소개되는 과정을 살펴 [End Page 95] 보았고,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한 프랑스 미술관 제도와 관련된 역사적 맥락 과 요인을 살펴보았다. 1970년대 프랑스 미술관은 퐁피두 센터의 건립과 개관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문맥 속에서, 전통적 미술관 개념 및 존 재 방식의 총체적 변화를 꾀하며, 보다 새로운 예술 매체, 형식 및 국제적 작가를 물색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황화'(黃禍, yellow peril)를 자칭하며 소란스럽고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시선을 끌고, TV 모니터와 비 디오를 등록 상표로 사용하여 반제도주의적 플럭서스 정신을 계승하며 본 격적인 비디오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고 있던 한국인 백남준은 아마도 프 랑스 미술관에게 굉장히 매혹적인 대상이었을 것이다.20 어쩌면, 김영나의 지적처럼, 플럭서스에 정신적 바탕을 둔 그의 탈경계적 예술 미학은 아시아 출신 작가들에게 늘 자신들에게 결여된 어떤 '타자성'을 기대하는 서양인들 의 욕구를 충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새롭고 충격적인 스펙터클 한 행위와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서양 아방가르드 전통과의 '동일 시'를 이루었기 때문에, 유럽 미술관에서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310). 결국 이렇게 프랑스에서 위로부터 '발견'되고 만들어진 초기 백남준 예술은 단기적으로는 현지 미술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 비디오라는 새로운 기술매체를 독자적 예술로 자각할 수 있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장 기적으로는 프랑스 내 비디오 예술사적 계보를 성립시키면서 프랑스 비디 오 및 미디어 예술사의 시작을 예고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970년부터 시작된 이 같은 백남준 예술에 대한 서양 미술관의 적극적 제도적 승인은 분명 애초에 기존의 가치체계와 제도에 대한 반예 술적 도전을 지향하던 그의 예술을 고급예술의 영역에 안주시키며 일반 대중과 사회로부터 이탈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1980–1990 년대 미국 페미니즘 미술 비평을 대표하는 마르타 게버(Martha Gever)나 [End Page 96] 마르타 로즐러(Martha Rosler)는 백남준을 비디오 예술의 '아버지' 또는 유 일무이한 '창시자'로 놓는 문제에 관하여 페미니스트적인 관점에서 비판적 태도를 보이며, 당시 미국과 유럽의 주요 미술관들이 앞 다투어 그의 작품 을 전시하며, 그를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추앙하던 당시의 미술계 모습 이면에 잠재한 집단적 '신성화'(sanctification) 움직임에 대한 비판을 서슴 지 않았다.21 그리고 이를 통해 백남준 예술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미학적 비평과, 또 그의 예술을 가능케 했던 사회, 문화, 기술, 제도적 조건들에 대 한 성실한 고찰을 촉구한 바 있다. 바로 이 같은 맥락과 관점에서 본 연구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연구는 무엇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백남준 예술이 프랑스 미술관에 처음 진입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그 역사적, 사회문화적 의미를 미술관 제 도의 관점에서 밝혔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연구는 주로 작가 및 작품론, 백남준의 기술•철학 및 미학적 담론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던 종래의 백남 준 예술 역사 기술 방법과는 거리를 두고, 어떻게 그의 초기 예술이 국제적 으로 전파, 유통, 소비 및 수용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가 국경을 초월한 세 계적 '초국적 예술가'(김영나 310)로 성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서양 미술 관 제도의 역사적 조건과 맥락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기초적 단서를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언어와 자료상의 제한으로 인해 미국, 독 일, 영국 등을 포함한 다른 서양 국가들이나, 한국 및 아시아 지역 국가들 의 미술관에서 초기 백남준 예술이 소개되는 과정을 통시적•공시적으로 고찰하지 못했다는 한계도 있다. 아울러, 미술관 전시와 같은 문화 컨텐츠 연구는 그것이 생산되는 환경과 맥락뿐만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다양한 힘의 역학 관계 및 정치와 관련된 문제, 더 나아가 그것을 수용하는 관람객 개개인의 반응이나 현지 예술 단체들의 수용 태도 및 인식 역시 중요한 분 석 대상이다. 하지만 본 연구에서는 제도로서 미술관이 생산했던 '공식 [End Page 97] 적'(official) 담론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 백남준 전 시를 관람했던 작가 개인 및 그룹들,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을 나눈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없었다는 한계도 분명히 있다. 문화적 현상 및 제도로서 미술관 공간 내에서 충돌하는 지배적 담론과 소수의 목소리, 그 리고 그에 따라 서로 상반되는 힘과 권력의 중재과정 및 중첩지점 등과 관 련하여 보다 비판적인 주제 접근이 필요하며, 이는 추후 연구 과제로 남아 있다. 본 연구를 바탕으로 앞으로 백남준 예술과 미술관 제도간의 역사적 상관관계 및 그 정치학에 대한 보다 다양한 추후 연구들이 시도될 수 있기 를 바라고, 또 그를 통해 백남준이라는 한 예술가의 예술적 현실이 형성되 고 발전하는 시공간적 배경을 보다 더 국제적이고, 입체적인 역사적인 관 점에서 분석할 수 있는 탈경계적 연구들이 더욱 더 많이 등장할 수 있기를 전망해본다. [End Page 98]
Ilmin NAH is a Ph.D. candidate (cultural studies) in Department of Arts and Aesthetics in Université Paris I (Panthéon-Sorbonne). After graduating from Korea University (B.A. French language and literature), she received a B.A. and an M.A. in Contemporary art history from the Université Paris I (Panthéon-Sorbonne). Currently, she is preparing a doctoral thesis on the comparative history of new media collections of the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of Korea and France. Her research interests include the relationship between cultural products and museum institutions and issues related to representation, heritage, identity, memory, and power. ilmin.nah@gmail.com
Works Cited
Footnotes
1. 영미권의 museum, 혹은 불어권의 musée라는 용어는 박물관과 미술관 등 소장품을 가지 고 전시 시설을 운용하는 기관을 아우르는 보다 폭넓은 개념이다. 우리가 흔히 박물관학, 즉 museology(혹은 musé ologie)라고 알고 있는 학문분야 역시 박물관과 미술관의 운용에 관한 연구를 아우르는 광의의 개념이다. 하지만 미술관은 예술 작품과 미술사를 다루는 곳 이고, 박물관은 유물뿐만 아니라 한 사회의 역사, 문화, 생활양식과 관련된 모든 물질문화 를 다루는 곳이기에 개념의 세분화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미술관을 중심으로 다루는 본 고에서는 일반적으로는 미술관이라고 통칭하기로 하며, 박물관(미술관)이라고 명시하는 경우는 의미의 분명한 구분이 필요한 경우, 혹은 해당 연구자가 박물관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였지만, 미술관 연구 분야에까지 그 이론적 틀이 적용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 기 위해서이다.
2. 이 글에서 제도(institution)란 인간의 행동, 사고, 인식, 관점, 취향과 삶의 방식을 일정한 방 향으로 이끌어 주고, 규제하는 사회적으로 조직화된 관행과 절차를 의미하며, 미술관을 제 도로 보고 연구를 진행하기를 권장한 심사위원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였다. 서양 미술관 제도와 관련된 역사적, 사회•문화적 문맥 안에서 초기 백남준 예술의 프랑스에서의 수용 의 의미에 대해 고찰할 수 있도록 논문의 내용과 형식수정, 그리고 이론적 토대를 다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세 분 심사위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3. 새로운 박물관학을 주창한 영국의 피터 버고(Peter Vergo)는 1989년 발간된 그의 저서 The New Museology 를 통해 과거의 박물관학이 너무 방법론에만 치중한 나머지 박물관 의 사회적 존재 이유, 그리고 실제적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다고 주장하였 다. 버고는 박물관(미술관) 속 사물의 의미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적이고 문맥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어떤 사물을 선택하고, 제외시키는지, 사물을 어디에 위 치시키고, 또 그것을 어떤 다른 사물들과 함께 보여주는지 등, 박물관 속의 모든 사물들, 그 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행위 모두가 역사 속에서 의미를 구축하는 과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접근은 박물관의 목적과 의도에 연구자들의 관심의 초점을 옮기고, 그것이 토대한 사회, 문화, 정치적 맥락과의 관계망 속에서 박물관의 의도를 비판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였다. 버고의 새로운 박물관학은 이후 90년대 영미권에서 스테판 벨(Stephen D. Weil), 샤론 맥도날드(Sharon Macdonald), 이반 카프(Ivan Karp) 등이 진행한 비판적 박물관학(critical museology)으로 발전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자료들을 참조. Vergo, Peter, editor. The New Museology . Reaktion Books, 1989; Karp, Ivan, and Steven D. Lavine, editors. Exhibiting Cultures: The Poetics and Politics of Museum Display. Later Printing ed., Smithsonian Books, 1991; Macdonald, Sharon. The Politics of Display . Routledge, 1998; Weil, Stephan. Making Museums Matter . Smithsonian Institution Books, 2002.
4. 국제 박물관 협의회(ICOM) 의 박물관학 연구회(ICOFOM) 에 의해 발간된 박물관학 사전에 따르면, 전시 상황에서 뮤제오그라피는 전시 테마의 설정부터, 작품 선택, 작품 배치, 동선 설 정, 전시에 어울리는 공간 디자인, 관객의 전시 이해를 돕기 위한 시청각 보조 자료 및 그래 픽 디자인의 고안 등, 전시 공간에 '의미'를 형성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개념적, 실질적 작업 을 지칭한다고 정의한다. Cf. Mairesse, François, and André Desvallées. Dictionnaire Encyclope ´dique de Muse´ologie . Armand Colin, 2011.
5. 미디어의 사전적 정의는 의사나 감정 또는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마련된 수단을 의미 한다. 이는 라틴어 medium('중간의' 라는 의미) 에서 파생된 단어로, 이후 신문, 라디오, 텔 레비전, 영화 등 대중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목적과 기능을 지닌 매스미디어의 발달뿐만 아 니라 다양한 전자 통신 기술 매체의 발달로 인해 '대중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목적과 기능을 가진 매체'를 의미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예술 분야에 있어서 미디어라는 개념은 전통 유화 기법에서 안료를 개기 위해 사용하는 기름을 지칭하였지만, 60년대 이후 해프닝, 퍼포먼스, 바디 아트, 비디오 아트, 설치 및 개념 미술의 도래로 미디어라는 개념은 '작가의 생각과 사 상을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언어적, 도구적, 정신적 물리적 수단을 지칭하 는 개념'으로 그 의미 영역을 확장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의 글 들을 참고. 요시미 순야. 『미디어 문화론』. 안미라 역. 커뮤니케이션 북스, 2006; Barbanti, Roberto. Les origines des arts multi-me ´dias: L'influence des mne´mo-te´le´-technologies acoustiques sur l'art . Lucie ed., 2009.
6. 이용우는 비디오 예술의 기원 및 발생이 대한 연구인 그의 저서 『비디오 예술론』을 통해 초 기 비디오 예술을 60년대 후반부터 미국 및 유럽에서 열린 역사적 비디오 전시회들을 통해 살펴보았다. 김은지는 독일과 일본의 미술관에서 소장품 분석을 통해 서양 미술관의 백남 준 예술의 수용을 이미 고찰한 바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 1970년대 중반 이후 나타나는 현 대예술의 다원화된 내용과 형식으로 그 관심 영역을 확장하던 서양 미술관 모델의 총체적 변화의 흐름이라는 제도사적 문맥과 배경을 통해서 접근하지는 않았다. Cf. 이용우. 김은 지. 『비디오 조각과 젠가: 전자기계기술예술, 백남준 그리고 미술관–독일과 일본』. 한국학 술정보, 2011.
7. 1978년 다니 블로크(Dany Bloch)와의 인터뷰에서 플럭서스가 그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 인지에 대해 백남준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다른 플럭서스 멤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 에게 플럭서스는 정말 중요하다. 물론 플럭서스는 공동체 경험이기에 나의 역할을 지나치 게 과장하는 것도 좋지 않다. 모두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과 자리에서―그것이 돈, 명성, 그리고 재능이 되었건―그들만의 수단으로 플럭서스에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플럭서 스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플럭서스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그 어떤 공식적인 도움없이 예술가들 스스로에 의해서 독자적으로 생겨난 움직임이 다. 그것은 국제적이고, 분권적이고, 가난하고, 젊으며, 그 무엇보다 아나키스트적이다. 플 럭서스는 예술 운동이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살고 또 함께 죽는 일종의 정 신의 상태이다." 다음의 인터뷰를 참고. Bloch, "Deux ou trois choses qu'on sait de lui: entretien avec Nam June Paik." Lee Nouvelles Littéraires, no. 2664, Dec.
8. 「Etude for Piano Forte」 (1959).
9. 「One for Violon Solo」 (1962).
10. 당시 발간된 전시 도록에는 백남준이 60년대부터 제작한 미디어 작품들의 기술노트들이 실려 있어서, 초기 백남준 예술의 개념이나 양식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Cf. Nam June Paik: videa'n videology 1959–1973 . Everson Museum of Art, 1974. Exhibition Brochure.
11. Cf. Nam June Paik. Werke 1946–76 Musik-Fluxus-Video . Kö lnischer Kunstverein, 1976.
12. "La peinture commence avec Buren, Mosset, Parmentier et Toroni." 1966년 12월부터 1967년 9월까지 B.M.P.T.는 파리에서 네 번에 걸친 행사(manifestation)를 개최함으로써 새로운 회화의 시작을 알린다. 이 문장은 파리 비엔날레에서 그들이 네 번째 개최한 행사 의 제목이었다.
13. 프레드 포레스트의 사회학적 예술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자료 참고. Forest, Fred. Art sociologique . Video, Coll. "10/18." UGE, 1977.
14. 이용우에 따르면 당시 출품하였던 다른 작가들은 이 전시 이후 비디오 작업을 지속하지 않 아 더 이상의 족적이 발견되지 않는다(214).
15. Dossier d'artiste Paik Nam June. (BVAP PAIK) [전시 초청장] 퐁피두 센터 칸딘스키 도서 관. 파리. 프랑스.
16. Breerette, Geneviève. "Trafiquants de lumière." Le Monde , 9 Dec. 1978.
17. 다니 블로크는 70년대 초기부터 파리 시립미술관 ARC 부서의 대외업무를 담당하고, 프랑 스에서 처음으로 「예술과 비디오」("Art et Video," 1960–1980/82) 라는 제목의 비디오 예 술에 대한 박사학위논문을 쓴다. 파리에 있던 백남준의 지인들 중 한 명이었으며, 장-폴 파르지에와 함께 70년대부터 프랑스 내에서 지속적으로 백남준 예술을 옹호한 비평가 중 의 한 사람이다.
18. 몇 년 뒤 1982년부터는 크리스틴 반 아쉬가 '비디오 부서' 라는 독립된 분과를 운영하게 되 면서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은 본격적으로 비디오 작품들을 수집, 전시, 관리 및 보존하기 시작한다. 참고로 이 부서는 1992년부터는 뉴미디어 서비스(service des nouveaux médias)로 명칭을 변경한다.
19. 더불어 백남준이 1970년대 초반부터 그의 지인이었던 당시 프랑스 미국 문화원의 돈 포레 스타(Don Foresta)의 초청으로 자주 파리를 방문하면서 프랑스 현지 지인 및 예술적 '추종 자' 들과 교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당시 그가 프랑스 예술계에 미친 영향을 조 심스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백남준은 포레스타의 초청으로 프랑스 미술 교육의 중 심인 파리 장식미술학교(École des Arts Décoratifs)와 파리 생드니 8대학(Université Paris VIII-Vincennes Saint-Denis)의 미술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습 강좌들을 진행하 며 예술에 대한 강연뿐만 아니라, 본인의 최근작 혹은 앞으로 구상하고 있는 작업들을 학 생들과 교류하였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 미국 문화원장을 지낸 돈 포레스타는 프랑스 국립장식예술학교 내에 유럽 최초로 비디오 예술 전공과정 개설에 기여하고, 향후 미디어 예술 이론가, 작가 그리고 교육자로서 미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지속적으로 프랑스 내 비디 오 및 미디어 예술 진흥에 기여한 인물이다. 1976년부터 그는 미국 문화원과 장식예술학 교의 교육 과정의 일환으로 비디오 창작 실습수업을 도입하면서 당시 활동하고 있던 국내 외의 비디오 작가들을 초대하여 수업을 진행하였다. 당시 초대되었던 작가들 중에는 백남 준을 비롯하여 빌 비올라(Bill Viola), 게리 힐(Garry Hill) 등 초기 비디오 예술 발전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20. 백남준은 1963년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에게 건넨 편지 스케치에서 "황화는 바로 나다!" (Yellow peril, c'est moi!)라고 썼다. 백남준의 작품인 「Yellow Peril!」 (1963–1964) 참고할 것.
21. Cf. Rosler pp. 242–51; Gever pp. 12–16; 이용우 pp. 18–20.